아이폰SE의 국내 반응이 미진하다. 4인치 액정에 대한 통신업계 회의론이 어느 정도 들어맞은 셈이다. 통신업계는 아이폰SE의 국내 출시에 앞서 5인치 이상 패블릿폰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4인치 제품을 찾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제기한 바 있다. 국내 중저가폰 시장이 20만~30만원대에 형성된 상황에서 50만원대 가격은 경쟁력이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아이폰SE가 10일 국내에 출시된 지 일주일이 지난 현재 판매량은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최신폰 출시 첫 주는 향후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초도물량이 다 판매된 뒤 아직까지 추가 물량이 들어오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이동통신 3사가 들여온 아이폰SE 대수를 판매량으로 가늠할 수 있다.
통신업계 관계자(이종천 전국이통유통협회 이사)에 따르면 이통 3사가 들여온 물량은 1만대에도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는 지난해 하반기 출시된 아이폰6S의 판매량보다 저조한 수준이란 것이 통신업계 입장이다. 이통사 관계자는 “아이폰SE 판매량이 6S 판매량의 10%도 안 될 것이란 해외 관측이 있었다”면서 “국내에서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적은 물량과 낮은 지원금, 통신업계 부정적 전망
오프라인 매장에서 품절된 이유가 높은 수요가 아닌 공급 부족 때문이란 뜻이다. 애초에 물량을 확보하지 못한 휴대폰 판매점과 대리점도 상당수였다. 이통 3사가 적은 물량을 직영점과 온라인 홈페이지에 집중시켰기 때문이다. KT는 온라인에서만 판매를 진행했다.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는 직영점 위주의 오프라인 유통망에 물량을 공급했지만 그마저도 수가 적었다. 서울 종로구 SK텔레콤 직영점에는 10대, LG유플러스 직영점에는 5대 정도 물량이 들어왔다. 한달에 3000대 정도 판매하는 도매 대리점에도 평균 5대 정도가 들어온 것으로 파악됐다.
이처럼 통신업계는 아이폰SE 판매에 소극적이다. 물량을 적게 들여왔을 뿐만 아니라 실어 주는 지원금도 낮았다. 가장 비싼 요금제(월 11만원가량) 기준으로 이통 3사의 지원금은 평균 12만원으로 책정됐다. SKT와 KT가 17일 G5에 지원금을 최고 25만원선까지 올린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금액이다. G5(83만6000원)와 아이폰SE(56만9800원, 16GB) 출고가는 26만6000원 정도 차이가 나지만 실구매가는 15만원 정도로 좁혀진다.
통신업계가 성공 가능성이 높은 제품에 많은 지원금을 싣는 것을 고려하면 아이폰SE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반영된 셈이다. 시장 상황을 보며 지원금을 천천히 올리던 단통법 시행 초기와는 달리 최근에는 출시 초기부터 많은 지원금을 얹는다. 경쟁사와 초기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 마니아층의 수요가 예상보다 많지 않을 것이란 이통 3사의 판단이 10일 지원금 수준을 결정한 것이다.
이통 3사에 아이폰SE보다 아이폰6의 판매가 시급한 문제란 점도 하나의 요인이다. 통신사별로 1만대 이상 남아 있는 아이폰6의 재고를 아이폰7 출시 이전에 소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플이 매년 9월 신제품을 공개해 온 만큼 아이폰7 출시일도 그때쯤으로 점쳐진다. 업계에서는 이통 3사가 아이폰6 재고를 적어도 8월 이전에는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폰SE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저가치고 높은 가격과 진보 없는 디자인이 문제
아이폰SE가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친 데에는 높은 가격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20만~30만원 대에 형성된 국내 중저가폰 시장에서 아이폰SE 출고가는 상당히 부담스런 가격이다. 장중혁 애틀러스리서치 부사장은 “중저가를 표방했지만 고가에 가까운 아이폰SE 포지션이 부진한 판매량에 영향을 미쳤다”면서 “애플은 `자사 제품은 고수익`이라는 이미지와 렌털폰 서비스 때문에 보급형 폰 가격을 낮게 책정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애플 렌털폰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온 아이폰 중고가가 30만~40만원대에 결정되는 만큼 신제품 가격을 그 이하로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디자인도 판매 부진에 한몫했다. 애플이 아이폰 초기 이용자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데만 치중, 아이폰SE를 아이폰5S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출시했기 때문이다. 아이폰4S를 사용한 적 있다는 일부 소비자는 4인치짜리 액정은 마음에 들지만 두꺼운 베젤과 두께 등 아이폰5S의 단점이 개선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아이폰을 사용해 보지 않은 소비자에게 아이폰SE의 디자인 한계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2011년 국내 5.29인치 갤럭시노트가 출시된 이후 2~3년 동안 5인치 이상 패블릿폰이 대거 출시되면서 대화면 폰이 추세가 됐다. 애플이 2014년 아이폰6(4.7인치)와 아이폰6+(5.5인치)를 선보인 것도 이런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서다. 큰 화면을 쓰던 사용자가 다시 작은 화면을 쓰기는 쉽지 않다는 게 통신업계의 중론이다.
아이폰SE 출시는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던 애플이 제품군을 다양화했다는 점에선 고무된다. 다만 국내 중저가 시장에서 이미 입지를 확보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고 애플 마니아층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판매량도 앞으로 미미할 것으로 전망된다.
함지현기자 goha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