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물가가 심상치 않다. 소주, 음료수, 두부, 계란 등 서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 있는 품목 가격이 5~6%씩 올랐다. 적지 않은 금액에 서민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맥주, 아이스크림 등 앞으로도 인상품목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업체들은 제조 원가 상승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하지만 유가하락은 물론 상당수 원재료 가격은 오히려 하락 추세다. 전문가들은 다른데서 이유를 찾고 있다.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매우 낮아지면서 업체들이 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2011년 4%에 달했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지난해 0.7%까지 떨어지는 등 디플레이션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에 정부가 물가 상승률을 적정 수준으로 높이고 세수도 확보하기 위해 제품가격 인상을 용인하는 분위기라는 분석이다.
실제 기획재정부는 2016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물가를 올려 성장 동력을 만든다’는 내용을 경제 활력 제고 방안 과제로 명시했다. 물가인상을 통해 기업 매출과 이익을 높이고 이를 투자와 고용확대, 임금인상으로 연결하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가겠다는 전략이다.
소비자물가지수 관리는 디플레이션을 방어하기 위해 쓰는 경제정책 수단이다. 경기하락을 방어하거나 경기저점에서 경기회복을 앞당기기 위해 종종 쓰인다.
많은 경제학자는 디플레이션을 인플레이션보다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대공황이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촉발됐다. 1930년대의 대공황이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도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다.
이런 디플레이션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총체적인 수요 감소에서 초래됐다. 생산된 상품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급증하면 생산자는 가격을 낮추고 생산을 줄인다. 경기가 나빠지는 것이다.
이런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쓰는 전략 중 하나가 소비자물가를 올리는 것이다. 원론적인 경제학 측면에서 현 정부 정책은 일견 타당성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다른 것 같다.
결과만 놓고 볼 때 물가가 오르는 것은 경기가 좋다는 의미다.
하지만 다른 변수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물가만 오르는 것은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늘리는 등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가계 소비가 늘고 투자가 살아나는 등 경기 흐름이 바뀌고 물가가 오르는 게 순서다.
특히 소비가 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소득이 먼저 늘어야 한다. 가계들이 보는 미래 전망이 밝아야 하고 고용지표 개선도 선행돼야 한다.
물가를 올리는 건 쉽다. 공공요금을 올리면 물가는 금방 오른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정책은 경기에 독이 될 수 있다. 경기가 살아야 물가가 오르는 거다. 물가만 올린다고 경기가 활성화되지는 않는다.
상황인식 순서가 바뀌었다는 얘기다.
지금 상황에서 상품이나 공공요금을 올린다고 소비가 늘어날까?. 경기전망도 불투명하고 가계 소득 증가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오히려 물가 인상은 소비를 더 위축시킬 개연성이 크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상품가격 인상으로 매출이 늘고 이익이 늘어난다고 투자와 고용을 늘리고 임금을 인상할 것이란 기대도 하기 힘들다. 청년 고용이 곤두박질 친 2009~2012년 사이 10대그룹 사내유보금은 271조원에서 457조원으로 1.7배 늘었다. 현 정부 들어서도 2015년 사내유보금은 600조원을 돌파해, 6년 전에 비해 2.2배 이상 늘었다.
자칫 물가를 올려 경기를 살리겠다는 정부 정책이 ‘국민 주머니를 터는’ 결과만 초래할 수 있다.
홍기범기자 kbho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