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 과학기술 관련 투입은 비율상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과학기술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인력과 기반을 갖추고 과학기술 선도국으로 도약을 모색하는 시점에 있다.
그렇지만 이런 투입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과학기술을 활용한 산업적 성과가 과거와 같지 못하며, 세월호 사건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우리 사회 주요 문제 해결에 과학기술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반성도 있다.
이런 평가는 과학기술 환경 변화에 기인한다. 과거 우리가 외국을 모방·추격할 때에는 선진국의 길에 비춰 기술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투입 증대만으로도 일정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원을 집중 투입해 빠르게 추격하고 우리 조건에 맞게 개선해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이런 접근의 한계가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추격이 상당히 이뤄져 모방할 대상도 많지 않다. 또 선도국을 모방해도 다른 후발국에 쉽게 따라잡히는 상황이 벌어진다. 우리의 독자적인 궤적을 개척하지 않고는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새로운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그동안 산업혁신 중심의 접근 때문에 경시됐던 사회영역에서 과학기술을 향한 요구가 분출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도전과제에 과학기술이 응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환경변화는 과학기술을 공급이 아니라 수요 측면에서 보는 프레임을 요구한다. 시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개발된 기술이 사회 속에 어떤 과정을 통해 안착하는지, 우리 사회의 문제는 무엇이고 과학기술이 그것의 해결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수요를 구체화하고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과학기술을 탐색해야 한다. 과학기술 공급과 수요의 연계 고리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지식과 인력, 자금의 공급을 넘어 사용자의 수요를 파악하고 사용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 공급자와 사용자를 연계하는 정책이 요구된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산학연 혁신주체들은 공급 중심 활동에 집중해 왔다. 이 때문에 수요를 정의하고 사용자와 공동 작업을 하는 데에는 익숙지 않다. 새로운 일하는 방식과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인문사회 융합연구’에 대한 연구소와 대학의 관심, ‘사용자 경험’과 ‘서비스 디자인’에 대한 기업의 강조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 지자체를 중심으로 사용자가 혁신활동에 주요 주체로 참여하는 ‘리빙랩(Living Lab)’을 주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용자의 위치에 있는 사회적기업의 사회혁신 활동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의 증가도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사용자 참여로 수요를 구체화하고 사용자가 현장의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을 활용하려는 시도다. 과학기술의 논리가 아니라 수요와 사용자의 프레임으로 기술혁신의 지향점과 방향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경향은 향후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성장률의 감소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연구개발투자 비율로 인해 연구개발투자의 확대가 과거 고성장 시대처럼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요와 문제를 중심으로 기술과 자원을 효과적으로 개발·활용하고 결합하는 것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프레임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수요 중심의 프레임은 혁신주체들이 과학기술을 투입 중심이 아니라 사용자와 활용 중심으로 보는 관점이다.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다. 공급 중심의 관점으로는 더 이상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프레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송위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songwc@step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