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기술이 장비업체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를 통해 경쟁사인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로 흘러 들어갔다는 사건 2심에서 관계자들이 전원 무죄를 받으면서 검찰 수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이 기술 유출범으로 지목한 인원이 18명에 달했지만 모두 무죄를 받았고, 하이닉스와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는 삼성전자 기술을 훔친 기업으로 낙인 찍히면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어플라이드는 이 사건 때문에 삼성전자와 민사상 합의까지 했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라는 지적과 함께 사건 당사자인 삼성전자의 책임론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역대 최대 반도체 스캔들
당시 서울동부지방검찰청 형사 6부는 삼성전자의 핵심기술이 반도체 제조 장비 업체를 통해 유출되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했다.
수사 초동 정보 수집 단계에서 동부지검은 국가정보원의 협조와 대검찰청 디지털포렌식센터의 지원을 받아 수사한 결과, 반도체 장비 업체를 통해 삼성전자의 핵심기술이 경쟁사로 유출되고 있는 실태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에 동부지검은 2010년 2월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부사장과 하이닉스 제조본부장 등 4명을 구속기소하고 어플라이드 한국지사, 하이닉스, 삼성전자 관계자 등 14명을 불구속기소했다.
어플라이드 임직원들이 보안 검색대를 피해 서류를 몰래 갖고 나오거나, 삼성전자 직원과 외국 출장을 함께 가면서 삼성 직원 컴퓨터에 저장된 반도체 개발 현황과 평가 결과 등이 담긴 파일을 복사해 빼돌리고, 이를 하이닉스에 전달했다는 게 검찰의 수사 결과였다.
동부지검은 불법 취득한 자료가 삼성전자의 중요 기술 95건에 달하고 이 중 40건은 ‘국가 핵심 기술’로 지정된 것이라며 직접적인 피해액만 수천억원, 후발주자가 기술격차를 줄여 발생하는 간접 피해까지 수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원 “공지된 내용, 삼성 영업비밀 아니다”
최근 이뤄진 2심에서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삼성전자의 중요 기술이라던 정보는 이미 공지된 내용이거나 심지어 삼성전자 기술로 확인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구리배선 공정 정보와 관련, 재판부는 삼성전자의 영업비밀로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직원들이 이메일을 통해 하이닉스에 “삼성전자가 D램 메모리와 플래시 제품에 탄탈륨(Ta)과 탄탈륨나이트라이드(TaN) 이중막을 사용한다”는 내용을 전달했지만 이는 논문이나 인터넷 등을 통해 이미 공개된 정보라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삼성전자가 이 같은 내용을 공정에 적용하고 있다는 것은 삼성전자 연구원 등이 발표한 논문이나 강의자료로 업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삼성전자가 해당 내용을 상당한 노력을 들여 비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객관적 자료가 없어 영업비밀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공개된 내용인 데다 비밀로 관리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영업비밀 침해, 즉 기술유출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하 직원과 경쟁사 기술을 빼내도록 공모한 혐의로 구속됐던 하이닉스 임원에 대해 재판부는 지시나 관여를 인정하기 어렵고,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을 취득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 같은 이유 등을 들어 “각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지난 6월 20일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삼성 책임론 고개 드나
현재 이 사건은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최종 결론까지 대법원의 판단이 남아있지만 적게는 수천억원, 많게는 수조원 피해에 이른다고 주장했던 검찰은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하이닉스는 검찰 수사로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하이닉스 대표이사와 부사장 등 최고경영진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제조본부장은 구속됐다. 경쟁사 기술을 몰래 빼낸 기업으로 지목되면서 기업 신뢰와 대외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2010년은 매각 문제 등 하이닉스 회생에 중요한 시기여서 단순 기술유출 사건 이상의 충격이 전해졌다.
하이닉스는 검찰 발표가 나오자 “하이닉스와 삼성전자의 구리공정은 사용물질과 특성, 장비 구성 등 접근 방법이 완전히 달라 실제 하이닉스의 구리공정 개발 및 양산과정에 전혀 활용된 바 없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를 귀담아 듣는 곳은 없었다.
삼성전자도 이번 사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특히 장비 납품 업체와 경쟁사를 견제하기 위해 사건을 활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검찰의 기소가 있은 지 9개월 뒤인 2010년 11월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와 합의를 했다. 어플라이드에 민사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삼성전자는 3년간 장비 할인과 업그레이드나 기술지원에 대해 우선권을 가졌다. 결과적으로 검찰 수사가 삼성전자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 셈이다.
삼성전자가 유출된 정보의 실체를 몰랐는지도 의문점이다. 2심 판결에 따르면 문제가 된 정보들은 논문이나 인터넷 등에 공개된 것이었다. 또 일부는 삼성전자 연구원 등이 발표한 논문이나 강의자료라고 법원은 판단했다.
삼성전자는 사건 발생 당시 “수출 주력산업인 반도체 핵심 기술이 해외 장비업체를 통해 유출됐고 해외 반도체업체로도 기술이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어 국가적 손실이 우려된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D램 반도체 업체로,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삼성전자가 검찰 수사 발표를 등에 업고 위기감을 조장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기획취재팀기자 jeb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