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IT업체 종속, 대안은?
# A 대기업은 글로벌 독점 기업 B사의 데이터베이스(DB) 제품만으로 핵심 업무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비싸긴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나가는 `1등` 제품이기 때문에 다른 제품은 적용하려 하지도 않았다. 2020년 B사는 환율 변동, 물가 상승 등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300% 인상했다. A 대기업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은 크게 반발했다. B사는 연이어 새로운 유지보수정책도 발표했다. 제품 가격이 오른만큼 유지보수비용도 높이겠다는 게 골자다. 결국 기업들은 단체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들 기업들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안 제품이 없기 때문이다.
특정 IT 기업에 종속됐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가상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미 이러한 벤더 종속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기업들이 많다. 특히 다양한 제품 가운데 DB와 운용체계(OS)는 한번 도입하면 바꾸기 어려워 독점 기업들의 횡포가 더욱 심하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XP 지원 종료 방침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능상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MS의 일방적인 지원 종료 정책 때문에 고객들은 새로운 OS를 구입해야 하고, 산업용일 경우 관련 하드웨어 기기까지도 바꿔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한 영역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IT 기업들은 대부분 기존 고객들을 대상으로 수익을 더 높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이미 독점적인 위치로 신규 고객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 고객 대상 라이선스 감사 수위를 높이거나 확장 솔루션을 더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글로벌 독점 기업들의 특징은 고객들의 불매운동이나 이탈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불매운동을 해봤자 기존 시스템을 바꾸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고,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IT 벤더 종속, 비용 문제가 가장 심각
IT 벤더들은 시장 저변을 확대하기까지 고객 친화적으로 대응하지만 어느 정도 고객이 확보되면 입장이 바뀐다는 게 사용자들의 전언이다. 심지어 일부 IT 기업들은 제품을 팔기 전과 계약 체결 후 태도가 바뀌는 경우도 많다고 말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계약 체결이 되는 순간 소위 `갑`과 `을`이 바뀌는 경우도 많다”며 “전문 영역이다 보니 IT 업체가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경우가 많아 충분한 비용을 내고도 요구사항을 맘 편히 꺼내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벤더 종속에 따른 가장 큰 위험은 이들 정책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맘에 안든다고 도입했다 버릴 수 있는 일회성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라이선스 정책이나 유지보수요율을 바꾸게 되면 그대로 따르던지, 새로운 제품으로 교체하던지 해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고객이 리스크를 안기 싫어해 전자를 선택한다. 때문에 벤더 의존도가 심해질수록 비용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많은 기업 고객들이 IT 업체의 종속을 탈피하는 이유도 바로 비용 부담 때문이다. 대안 솔루션들은 기존 독점 솔루션에 비해 저렴하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영원한 1등이 없듯이, IT 업체도 영원할 수 없다. 한 업체에 너무 의존했을 경우 이 기업이 특정 이슈로 파산했을 때 기술 지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기업들이 멀티 벤더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가 독점 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자사 서비스의 안정성을 지속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해외에선 정부 주도로 종속 탈피 나서
지난해 유럽연합(EU)은 특정 IT 업체의 제품과 기술에 종속되는 `록인(lock-in)`을 피하기 위해 별도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 가이드라인에는 공공 분야에서 IT 솔루션과 서비스를 구매할 때 지나치게 특정 IT 업체에 의존하면 위험하다고 충고하고 있다.
영역별로 경쟁 업체들이 누구인지, 어떤 제품들이 있는지 상세 정보를 제공해 준다. 또 산업 표준 솔루션을 활용할 것으로 제안한다. 심지어 기존 IT 환경을 바꿀 경우 비용이 어느 정도 드는지도 참고자료로 제시했다. 함께 발표된 실행 지침서에는 특정 IT 벤더에서 고유하게 사용하는 용어 및 차별화된 독점 기술 등을 제안요청서(RFP)에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EU는 이를 통해 연간 공공 분야 IT 예산을 13억달러(약 1조4000억원)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U의 이러한 지침 발표는 IT업체들 간 경쟁을 유도하는 것은 물론, 공공기간들이 지속적으로 IT혁신을 이루고 예산 절감에 노력해야 함을 시사해 준다. 특히 이러한 방침을 유럽 지역 국가차원에서 공동으로 협의를 이뤄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중국에서도 최근 정부에서 `취IOE` 전략을 국가정책으로 다루고 있다. `취IOE`는 IBM(I)·오라클(O)·EMC(E)를 제거한다는 의미로, `탈 외산`을 일컫는다. IT 업체의 종속에 따른 위험을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민간 기업에서 시작된 취IOE 전략이 정부 전략으로 확대되면서 IT 시스템의 자국화 노력이 민관 합동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국가 차원 대안 마련 절실…주변국과 연합 전략 필요
국내에선 공공보다 민간 기업에서 상대적으로 벤더 종속 탈피 움직임이 거세다. 현대·기아자동차가 국산 DBMS인 티베로를 올해 표준시스템으로 선정한 데 이어 두산, 롯데, GS 등 대기업군이 오토데스크의 오토캐드 대안으로 ZW소프트의 `ZW캐드`를 도입했다. 캐드업계에선 국내 기업들의 독점 솔루션 탈피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캐드엔진을 국산화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정부 주도의 대책이 절실하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아직도 많은 정부부처 및 기관에서는 외산 솔루션에 대해 여전히 맹목적으로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RFP에 특정 브랜드의 제품을 명시하는 일도 잦다.
EU처럼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잘 알려진 솔루션만을 고집하는 관행을 개선하도록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이러한 혁신을 시도한 담당 공무원에 대한 보상체계까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공 분야 한 IT 담당자는 “대안 솔루션 도입으로 비용을 절감한 만큼 신규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도록 반드시 보장해 줘야 한다”며 “예산을 절감했다는 이유로 차후연도 예산이 줄게 되면 아무도 이러한 혁신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력있는 IT 솔루션을 만들기 위한 투자도 병행돼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OS를 제외하곤 영역별로 국산 제품이 대부분 존재한다. 글로벌 기업들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경쟁력있을 제품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적절한 지원책이 필요하다. 글로벌 기업들과 공정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 주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EU와 같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국가들과 연합 작전을 펼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MS의 OS를 PC에 설치할 때 자동으로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깔리지 못하도록 EU에서 법적으로 제재를 가한 것처럼, 독점 기업들이 자사의 위치를 악용해 비즈니스를 하지 못하도록 아시아지역 국가들이 공동으로 법제화할 수도 있다. 제품 개발을 공동으로 하는 것도 방법이다. `아시아눅스`와 같이 리눅스 기반의 기업용 서버 OS를 한·중·일이 공동 개발하는 프로젝트도 활발해 져야 한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