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문화로 읽다]개인정보의 위험성 `네트`

안젤라 베네트는 천재적인 컴퓨터프로그래머다. 신작 소프트웨어(SW)의 바이러스나 오류를 분석하거나 인터넷 세계를 떠도는 게 일상이다.

미모의 여성으로 보통 영화에 등장하는 천재 프로그래머와 이미지는 조금 다르지만 집에 박혀서 외부와 거의 왕래를 하지 않는다는 건 비슷하다. 이웃 사람이나 일하는 직장에서도 그를 아는 사람은 직장 동료 데일, 치매에 걸린 어머니, 그녀의 정신과 주치의 챔피온 정도다.

어느 날 데일이 보내준 프로그램에 치명적인 오류를 발견한 안젤라는 데일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데일은 비행기로 오던 중 사고로 사망한다. 이 충격을 딛고자 멕시코로 휴가를 떠난 안젤라는 뜻밖의 공격을 받고 의식불명 상태로 3일을 지낸다. 다시 복귀한 일상에서 모든 게 바뀌어 있다.

자신의 이름은 어느새 루디로 변해 있고 안젤라라고 주장하는 자가 회사 생활을 버젓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챔피온도 그새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루디는 매춘 등 혐의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다. 경찰의 도움은커녕 도망을 다녀야 할 처지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사라진 가운데 이름을 되찾기 위한 사투를 그린 영화 `네트` 이야기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PC와 네트워크에만 저장해뒀던 게 안젤라의 상황을 더 꼬이게 했다.

1996년 출시된 이 영화는 인터넷으로 모든 PC와 개인이 연결되는 네트워크 시대의 문제점을 다뤘다. 1990년대 중반이면 전화 회선을 이용해 통신망에 접근하던 개인이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등 고속 데이터 송수신망으로 정보를 대량 유통하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이 후 통신망은 진보를 거듭했다. 특히 한국은 통신 인프라 구축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빨랐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초고속 디지털가입자회선(VDSL), 광통신이 등장하면서 데이터 유통에 속도가 붙었다.

이때부터 각종 정보를 인터넷으로 공유했다. 어떤 사이트든 가입을 하려면 이름, 주민등록번호, 이메일주소, 전화번호, 휴대폰번호, 직업 등 10여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결제가 필요할 때는 카드와 통장 계좌 등도 제공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고객 정보를 데이터베이스(DB) 서버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쓴다. 해킹을 하거나 정보 관리자가 부정하게 사용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노출될 위협을 받는다. 기업에 입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본인 혈액형 등 신상정보뿐만 아니라 가족의 신상도 일부 수집해 DB에 저장해 둔다.

최근 일어난 카드 3사 고객정보유출사건과 지난해 농협 등 은행전산망, 방송국 전산망 해킹사건 등은 20여년 전 영화의 현실 확장판이다. 그동안 발생한 사이버테러, 정보유출 사건을 떠올려 보면 이미 한국에 주민등록을 둔 사람이라면 적어도 두 차례 이상은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전까지는 정보 유출 때문에 스팸문자나 메일에 시달리는 정도에 그쳤다면 금융정보까지 빠져나간 지금은 경제적 손실까지 입을 수 있다. 내 주민등록번호와 계좌번호, 비밀번호를 활용해 대출을 받거나 고액의 물품을 구매한다면 나는 네트의 주인공처럼 `그 안젤라`가 `진짜 안젤라`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정부기관의 정보 수집 역시 위험하다. 사법기관이나 행정안전부 전산망이 뚫리거나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개인정보가 수정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물론 개인정보를 지키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구비돼 왔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정보통신망 서비스 사업자가 기술관리·물리적 보호체계를 갖추면 인증해주는 `정보보호관리체계(ISMS)`를 마련한 게 한 예다. 물론 인증이 의무는 아니다.

보호보다는 산업 진흥에만 초점을 맞춰 온 정부 정책도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온라인 유통업체나 금융회사를 막론하고 개인정보 활용 동의만 받으면 제3자에게 제공하거나 마케팅에 이용할 수 있다. 문제는 수집·활용 동의를 하지 않으면 아예 가입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복잡한 약관을 제시하면서 포괄적 동의를 받기 때문에 개개인이 일일이 이를 관리하기 쉽지 않았다. 정부의 정보 수집은 아예 개인의 동의 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통신망 사용은 현대 생활을 하는데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이 상태를 방치할 수는 없다. 정부가 최대한 꼼꼼한 정보 관리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 개인은 쉽진 않지만 최소한의 정보만 외부에 노출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씁쓸할 뿐이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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