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정보 표준화 이젠 필수
부산에 거주하는 김모 할아버지는 최근 앓고 있던 당뇨병이 악화돼 다니던 병원을 서울로 옮겼다. 김 할아버지는 부산에 거주하면서 인근 종합병원과 연계된 홈헬스케어서비스를 이용, 주기적으로 당뇨수치 측정 등 관리를 해왔다.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으로 옮긴 김 할아버지는 서울에 사는 아들집에서도 서울 병원의 홈헬스케어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가입했다. 부산 병원에서 관리하던 김 할아버지의 건강기록은 그대로 서울 병원으로 옮겨져 보다 체계적인 홈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김 할아버지는 초기 검진을 다시 받지 않아 비용부담이 줄어든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악화된 당뇨병을 빨리 치료할 수 있게 돼 더욱 안심이 됐다. 의료정보 표준화 기반으로 원격진료가 이뤄진 대표적인 가상의 사례다.
의료서비스 수준을 높이기 위한 원격의료 도입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이 이르면 이달 말 국무회의에 상정된다. 원격의료가 이뤄지면 홈헬스케어 등 가정에서도 손쉽게 만성질환 등을 관리할 수 있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원격의료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의료정보 표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원격의료 도입 취지인 의료서비스 수준 제고는 먼 얘기다. 지난 10여년 전부터 논의된 의료정보 표준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병원들, 의료 용어·서식·코드 모두 제각각
의료정보 표준화가 이뤄지지 못한 것은 병원마다 적용된 의료 용어와 서식, 코드체계 등이 모두 상이하기 때문이다. 국내 병원 대부분은 전자의무기록(EMR)시스템 등 다양한 의료정보시스템을 구축했다. 문제는 의료정보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적용된 표준체계가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국제표준을 준수했다 하더라도 표준을 제정한 국제기구와 분야에 따라 여러 개 표준이 존재해 적용한 것이 서로 다르다. 국제표준은 지속적으로 항목을 추가해 상당 부분이 상이한 상태로 중복돼 있다. 대형병원의 의료정보화 표준은 중견·중소병원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중견·중소병원들은 재정형편이 어려워 표준체계를 적용한 의료정보시스템 구축은 엄두도 못 낸다. 일부 오래된 의사들이 병원 내 의사결정을 독점해 진료용어 표준화도 쉽지 않다. 중견병원 한 관계자는 “국제표준을 적용한 의료정보시스템을 구축하려면 인건비와 개발비가 높아져 엄두도 못 낸다”며 “용어와 서식 표준화도 의사들의 오래된 관행 때문에 어렵다”고 토로했다.
의료정보 표준화를 위해 기존 시스템을 수정하는 것도 병원으로서 부담스럽다. 이미 각기 다른 체계로 길게는 10년, 적어도 3년 이상 의료정보 데이터를 축적한 상태여서 기존 데이터 수정은 쉽지 않다. 의료정보 데이터 수정으로 인한 담당의사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것도 문제다. 의료 분쟁을 막기 위해 데이터 수정 시 당시 담당의사의 동의가 필요하다.
병원 경영진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의료업계 관계자는 “상당수 병원이 기초 검진 장비 도입에 많은 금액을 투자했기 때문에 의료정보 표준화로 인한 검진 데이터 공유를 기피한다”며 “환자들에게 한번이라도 검진장비를 더 사용하도록 해 수익을 올리려 한다”고 지적했다.
◇의료정보 표준화, 정부가 나서야
의료정보 표준화를 위해 무엇보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정부는 다수의 국제 표준 중 우리나라에 적합한, 해외에서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국제표준을 선정해 국내 의료 상황에 맞게 표준을 재정립해야 한다. 지난해 정부는 국제 보건의료 용어와 분류체계 표준화를 추진,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에 불과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표준화를 의료 용어에서 서식과 정보통신기술(ICT) 등으로 확대해야 한다. 마련된 표준체계를 병원들이 적용,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국공립 의료기관은 물론이고 민간병원으로 확대하는 지원체계도 갖춰야 한다. 재정환경이 안 좋은 중견·중소병원들에 재정지원이 절실하다.
대표적으로 기존 병원들의 상이한 의료 용어체계를 표준체계로 전환하는 별도의 시스템을 개발, 적용하는 방안이 대두되고 있다. 표준코드 시스템을 적용하면 병원들은 기존 의료정보시스템 수정 없이, 국가 표준을 적용할 수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난해 의료용어 표준 체계 마련에 이어 올해는 서식과 기술을 대상으로 표준체계를 마련할 계획”이라며 “장기적으로 표준체계를 활용할 수 있는 로드맵도 수립할 것”이라고 전했다. 중견·중소병원들이 표준체계 적용을 위한 재정지원 방안도 마련한다.
범정부 차원의 의료정보 표준화 노력도 필요하다. 원격의료 시행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이 개인정보보호법 등 다른 법률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지를 파악, 해결해야 한다. 의무기록 관리 보존 관련 법규도 정비해야 한다.
황희 분당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장은 “우리나라 병원은 의료정보시스템을 제각각 구축해 정보 교류가 어렵다”며 “정부가 정확한 방안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대한의료정보학회 이사장인 김주한 서울대 의대 정보의학실장은 “의료정보 표준화는 일부 병원이 주도하는 것보다 진료 기능별로 정부차원에서 전체 병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