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제조업 로드를 가다]아세안-④태국/중진국 함정에 빠진 태국, 제조업 고도화로 위기 극복한다

태국은 아세안 국가 중 처음 서방 국가에 개방의 문을 활짝 연 나라다. 서구 열강국과 적극적으로 교역에 나섰고, 균형감 있는 외교 덕분에 식민 지배를 피할 수 있었다. 근대 이후부터 인도차이나 반도 내 무역을 주도하게 됐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에는 농업에서 산업 기반 국가로 변신했다.

라오스·캄보디아·미얀마와 무역 거래시 태국 통화인 바트화 결제가 가능할 정도로 주변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태국이 중진국으로 올라서는데는 안정된 사업 환경과 국제무역 및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 정책, 도로·항구·전력공급·통신 등 사회 인프라가 큰 역할을 했다.

태국의 물류 시스템은 다른 아세안 국가를 압도한다. 태국은 25만㎞에 이르는 광대한 도로 네트워크를 구축했는데 이 중 40%는 모든 지역으로 통하는 국제 표준도로다. 225㎞가 넘는 인터시티 고속도로가 수도 방콕과 주요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향후 4150㎞로 확장된다.

지난 2004년 태국은 유럽 및 주요 아시아 국가와 협약을 맺고 총 32개국에 달하는 육상 무역로를 확보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무역 허브로서 입지가 더욱 공고해졌다.

철도 역사도 100년을 넘었다. 방콕을 중심으로 4000km에 이르는 3개 라인이 운영돼 632개 도시를 연결한다. 말레이시아 국경부터 태국 최북단과 서쪽 깐짜나부리까지 철도가 닿는다. 특히 말레이시아 국내 교통 시스템과 연결돼 있어 싱가포르로 이동하기도 쉽다.

국내 주요 도시마다 방콕을 잇는 28개 공항도 갖췄다. 지난 2006년 수완나폼 국제공항이 문을 열면서 항공 물류 인프라가 한층 더 탄탄해졌다.

한 때 태국은 우리나라가 아세안에 진출하는 거점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나라의 태국 투자가 가장 활발했던 때는 1990년대 후반이었다. 지난 1997년 양국이 동시에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이후 투자가 급감했다.

최근 삼성·LG 등 대기업들이 태국 내 가전 생산설비 투자를 늘리고 있다. 중소기업들의 소규모 투자도 잇따른다. 지난해까지 우리나라가 태국에 총 투자한 금액은 20억달러에 육박한다. 현재 태국에 우리 기업이 설립한 법인수는 700여개에 달한다.

삼성전기 태국법인은 우리 기업 중 가장 현지화에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지난 1990년 단독법인 형태로 태국에 진출한 삼성전기는 현지에서 1458명을 고용해 휴대폰·DVD·TV 등에 필요한 전자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태국 정부가 제공하는 투자 유치 인센티브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진출 준비 단계부터 투자 전문 인력을 확보해 시행 착오를 최소화했다. 전문 기술자를 현지에 파견해 태국 내 연구개발(R&D) 역량을 끌어올리고, 현지 인력을 한국으로 연수 보내는 등 직원 투자를 아끼지 않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장기 근속, 생산 수율 향상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냈다. 사실 베트남·인도네시아·필리핀 등과 비교하면 최근 태국에 대한 우리 제조 업체들의 투자는 다소 시들한 편이다.

태국은 나름 탄탄한 제조 기반도 구축하고 있다. 지난 2011년 상반기까지 세계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의 절반가량이 태국에서 생산됐다. 현재 10만명 이상의 태국인이 HDD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연간 4000억바트(약 133억달러) 이상의 수출 실적을 올리고 있다. 전자산업뿐 아니라 자동차 업종에서도 아세안 제조 허브 역할을 맡고 있다. 자국 제조업의 70%를 담당하는 외국인 투자 덕분이다. 태국 정부는 제조 산업 육성과 외자 유치를 위해 외자 기업이 원부자재를 수입할 때 감세·면세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천연자원이 풍부해 원자재 조달이 쉽고 6700만명에 달하는 인구 덕분에 노동력 확보도 수월하다. 다른 아세안 국가에 비해 소득 수준도 높아 내수 시장이 큰 편이다.

오랜 개방 역사로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으며, 외국인 주재원들이 생활하기 편리하다. 중국과 달리 태국 기업은 외자 기업으로부터 습득한 기술을 확보해 경쟁 상대로 부상하는 사례가 드물다.

태국 정부는 제조업 육성과 지역 균형 발전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투자 지역을 3개로 나눠 각각 다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방콕에서 먼 지역일수록 많은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태국 투자에 가장 적극적이다. 지난 2012년 일본이 태국에 투자한 금액은 3484억바트로 전체 외국인직접투자(FDI)의 63% 비중을 차지했다. 일본은 태국을 아세안 진출 전진 기지로 활용해 전자·자동차·가공 식품 등 제조업 전반에 걸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노동집약적 수출 산업이 임금 수준이 낮은 인근 국가로 이전하면서 태국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 태국 집권당이 국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임금을 적극적으로 끌어올리면서 제조업 경쟁력은 더욱 하락하고 있다.

최근 5년간 태국 내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안정적인 데도 불구하고 태국 정부는 지난 2012년 4월 방콕 및 인근 지역 일일 최저임금을 300바트로 올렸다. 지난해 3월에는 최저 임금 인상 정책을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다만 인금 인상에 따른 기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법인세를 종전 30%에서 지난 2012년 23%로 내렸고 지난해에는 다시 20%로 추가 인하했다.

태국 현지 제조업체 관계자는 “태국 정부가 제조업 육성을 위해 최소한의 균형 감각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며 “다만 지금처럼 인기 영합주의 정책을 더 확대한다면 태국 제조업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치 불안이 가중된 것도 문제다. 현재 태국의 극심한 정치 불안은 지역과 계급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잉락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방콕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다. 자칫 내전 사태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태국의 여론은 반쪽으로 쪼개져 팽팽한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방콕과 남부 지역은 야당 지지 성향이 강하고, 동북부와 북부는 여당 지지 성향이 우세하다.

태국 정부는 자유무역협정(FTA)에 적극 나서 수출 산업을 육성하고 한계 산업을 도태시키는 산업 고도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교역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과거에는 소규모 경제권을 중심으로 FTA를 추진했지만 최근에는 대규모 경제권과도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태국이 체결한 FTA는 모두 11개다. 태국이 개별적으로 맺은 협정은 페루·뉴질랜드·호주·인도·일본 등 5개국이며 호주·뉴질랜드·중국·인도·일본·한국 및 벵갈만 국가 등과는 아세안을 통해 FTA를 맺었다.

지난 2003년부터 아세안 국가 간 자유무역을 실시하면서 태국에서 인근 국가로 무관세 수출하는 게 가능해졌다. 미얀마·캄보디아·라오스 등 태국 인접 국가에 우회 수출하려는 외자 기업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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