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도·감청 동네북 대한민국

1998년 개봉된 영화 `애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충격이었다. 미국 안보국(NSA)의 감청과 도청 행위를 승인하는 법안을 반대하는 공화당 국회의원을 제거하는 음모를 파헤치는 내용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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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소개된 NSA의 다양한 도·감청 기법들은 지금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속옷 가게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로 용의자를 파악하거나 GPS와 인공위성을 이용해 건물 층간 위치까지 실시간으로 파악해내는 등 당시로는 신출귀몰한 기술들이 총망라됐다.

영화가 제작되기 10여 년 전인 1980년대부터 전 세계 휴대폰 통화를 도청해 `핵폭탄`, `백악관` 같은 단어가 나오면 자동 분류해 저장한다는 내용은 먼 미래 얘기로만 들렸다. 7년 후 우리나라 정보통신부 장관이 CDMA는 도청이 안 된다고 단언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도청 선진국인 미국과의 엄청난 격차를 실감케 한다.

15년이 흐른 지금, NSA가 전 세계를 상대로 도·감청을 벌여온 사실이 드러났다. 무대는 해외로 넓혀졌고 기술은 진보했다.

현재 NSA가 사용한 기술은 영화에 등장한 것보다 25년간 진화해 상상조차 힘들다. 음성 통화 도청을 넘어 수출하는 자국 통신 장비에 백도어를 설치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전 세계 네트워크를 제집 드나들 듯 했다.

기술이 정교해진만큼 대상도 세밀하고 치밀해졌다. 각국 정상들은 물론 반기문 유엔 총장까지 표적이 됐다. 자국 이익을 위해 전 세계를 도청 대상으로 분류했다.

수십 년 우방도 예외가 아니다. 도·감청 세계에서는 모두 잠재적 적대국으로 치부한다.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노무현 대통령부터 현 대통령까지 도·감청이 이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정보 수집에서 그치지 않고 그를 분석해 대응 시나리오까지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미국의 치밀한 도·감청 기법과 행태에 비례해 한심한 건 우리 정부 대응이다.

미국 도·감청 의혹이 제기됐을 때는 명확한 증거가 없어 외교적 대응이 어렵다며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문건이 공개되자 그때서야 미국 측에 우려 표명과 납득할만한 설명을 요구했다. 원론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도청을 벌인 당사자가 성실하게 소명할리 만무하다. 설사 미국이 정보활동에 대한 재검토 방침을 전했다고 한들 또다시 그대로 감행해도 우리 정부가 어찌할 것인가.

우방인 미국이 우리 대통령을 수십 년째 도청했지만 ISA 내부고발자가 없었다면 아직까지 아무 문제가 없었을 상황이다. 발견할 기술이 부족한 탓이다. 탐지 기술 격차가 적어도 10년은 넘는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도청 사실이 알려지자 정부 부처들은 뒤늦게 도청방지 장비 도입에 나섰지만 이 조차도 성능 논란으로 시끄럽다. 북한으로 추정되는 세력들이 사이버테러를 연달아 일으키고 수년째 군과 외교 관련 개인정보를 캐내갔지만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

안팎으로 동네북이 됐지만 속수무책이다. 방미한 대통령이 도청당하고 있을 때 우리 정부 수행원은 성추행을 벌였다.

사실이 이럴진대 화웨이를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화웨이는 이제 대응책을 마련하면 되겠지만 그동안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모르쇠로 일관한 시스코를 비롯한 미국과 미국기업의 일탈은 어찌할 것인가. 사이버 안보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자강노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게 정설이다. 정부의 대응책은 무엇인가.


서동규기자 dkse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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