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화두 가운데 하나가 갑과 을이다. 기업과 대리점 관계에서 시작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각 분야에 박혀 있는 가시를 제거하는 데 인용되고 있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부족한 재원은 국가기관이나 관공서·기업 지원으로 메운다. 대학이 조달하는 자금의 대부분은 연구비로 구성된다. 우리나라 연구비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국가 미래가 연구개발(R&D) 결과에 달렸다는 인식이 확산돼 정부의 연구비 지원 규모도 커졌다.

우리나라 논문 수도 비약적으로 늘었다. 교수업적 평가에 중요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 수도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보고된 연구 결과가 창조적이고 세계가 감탄할 만한 것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연구비 규모 문제라기보다 관리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대학은 산학협력단을 통해 연구비를 받고 관리한다. 연구비 규모가 커지면 대학은 산학협력단 인력을 늘리고 연구비 사용 감독을 강화한다. 또 연구비 사용 투명성을 요구하는 갑의 요구로 연구비는 법인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참여 대학원생 계좌로 인건비를 직접 이체한다. 클린카드 사용은 기본이다. 이 정도면 모든 연구자가 마음 놓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겉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내용을 들춰 보면 실제 연구비 사용 및 정산에 관한 오버헤드가 감소했는지 하는 질문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구비 비목별 사용이 전산화돼 있고 사용한 카드 금액이 전산에 올라와 있지만 뒷받침하는 사용내역은 아직도 하나씩 산학협력단에 명세서를 제출해야 한다. 1차적으로 담당 직원이 검토하고 결제가 이뤄지며 과제 종료 후에는 지원기관에서 다시 한 번 영수증을 검토한다. 그런데 이 과정이 항상 문제가 된다. 연구비를 비목별로 사용해야 하는데 대학 연구실에는 행정보조 인력이 따로 없어 대학원생이 정리업무를 담당한다. 학생 신분으로는 연구관리가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관마다 다른 집행 규정을 숙지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다. 학생 숙련도에 따라 서류 정리와 정산에 오류가 발생하고 이를 처리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돼 연구보다 잡일 처리에 시간을 더 많이 소요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카드 사용 시간과 요일, 사용인원별 금액까지도 고려해서 집행해야 한다. 비목에서 허용하거나 허용하지 않는 내용도 일관성이 없이 상황에 따른 변화가 많아 자칫 사용한 금액을 배상하는 사례가 연구 종료 후에 발생한다.
연구비 관리를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자. 우리가 밥 짓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때 평가 기준은 밥이 잘 됐는지에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밥을 준비하는 쌀 품종이 지정된 것인지, 사용하는 물은 허용된 물인지, 밥을 짓는 데 사용하는 연료는 정해진 품목인지를 따지는 것은 밥을 잘 짓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주객이 전도됐다. 연구비 문제가 바로 이런 상황이다. 물론 규정을 위반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잘못을 방지하는 차원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너무 불합리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정부나 공공기관 연구비로 PC를 구매하지 못한다.
컴퓨터학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컴퓨터학과에서 PC를 살 수 없으면 무엇으로 연구를 하나. 컴퓨터에 사용되는 소프트웨어(SW)도 범용성을 갖는 제품은 살 수가 없다. 워드프로세서를 비롯한 오피스 제품을 살 수 없으면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사용하라는 것인데 이런 환경에서 SW 산업은 발전할 수 없다. 이렇게 경직된 구조로는 주어진 규정에 익숙한 사람을 양산하지, 창의적인 인재를 키워낼 수 없다. 컴퓨터학과에서 조차 PC를 살 수 없는 연구비 구조는 갑의 상징이자 손톱 밑 가시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반면에 기업 연구는 비목별 사용 제약이 별로 없다. 대신에 연구결과를 철저하게 따지고 만족한 결과를 제공해야 한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노력에서 창조적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관리에 모든 신경을 써야 하는 관공서가 제공하는 연구비의 손톱 밑 가시는 언제쯤 누가 제거할 수 있을까.
권영빈 중앙대학교 컴퓨터공학부 교수 ybkwon@c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