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전력망의 중추신경인 중전기기 산업이 내수 시장 포화에 해외 진출 어려움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1960년대부터 국가 전력인프라를 도맡아 온 한국전력의 발주에만 집중하다 보니 해외 진출은 낯설기만 하다. 매년 반복되는 전력난으로 전력수급은 국가 차원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정작 중전기기는 관심 밖이다. 지금의 전력망은 물론이고 향후 스마트그리드와 신재생에너지 산업까지 감당해야 하는 국내 중전기기 산업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2회에 걸쳐 짚어본다.
국가 전력망을 포함해 건설·철강·반도체 등 산업 전반에 이르기까지 전기 공급을 책임지는 중전기기 산업이 위기다. 국내외 통틀어 수요처가 한국전력공사 하나뿐이다 보니 700여개 기업 중 이렇다 할 글로벌 스타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2011년 9·15 정전사태와 매년 반복되는 전력난으로 발전과 수요·공급 체계는 다각적인 측면에서 개선 중이지만 정작 이를 지탱하는 중전기기 산업은 `윗목의 냉골`이라는 지적이다.
27일 관련업계 따르면 한전의 중전기기 분야 구매 예산은 2009년 2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1조6000억원으로 40%가량 줄였다. 여기에 해마다 낮아질 수밖에 없는 한전의 입찰가격 구조로 관련 업계가 신음하고 있다. 업계는 글로벌 기업 발굴과 수출 산업 육성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중전기기 산업은 전기에너지의 생산·수송·공급과 에너지 변환 및 제어기기(변압기·개폐기·발전기)와 전선, 케이블로 나뉜다. 안정적인 전력 품질 유지는 물론이고 정전 등의 사고 발생 시 국민 생활과 산업 전반을 보호하는 국가 핵심이다.
하지만 한전의 발주 물량은 해마다 감소하고 건설 경기마저 위축되면서 내수 시장은 이미 포화돼 설자리를 잃고 있다. 여기에 중국 FTA 협상을 앞두고 있어 중국산과도 경쟁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산업 특성상 해외 진출도 쉽지 않아 업계 불안감은 날로 고조되고 있다.
업계 한 대표는 “중전기기 산업 태동기부터 시장이 한전에 집중되다 보니 발전적인 경쟁체제보다는 가격경쟁만 심해지고 있다”며 “한전 덕에 중전기기 산업이 발전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입찰가는 매년 낮아지고 물가·임금인상에 R&D나 해외투자는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전 입찰방식은 해마다 최소 1% 이상 낮은 가격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년도 납품 계약금액을 금년도 입찰금액 기준으로 정하고 입찰을 진행하기 때문에 낙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1%라도 낮게 해서 입찰에 참여하는 게 일반적이다. 결국 시장가격은 무조건 낮아질 수밖에 없다.
2010년 처음 적용된 전자식전력양계(E타입)의 입찰가는 2010년 2만1528원에서 2012년 1만6746원으로 2년 만에 20%가량 줄었다. 송·배전망에 사용되는 디지털계통보호전송장치(PITR) 역시 2005년 대비 지난해 입찰가격이 33%가량 줄었다.
백수현 동국대 교수는 “중전기기 업계가 한전 사업에만 목을 매다 보니 가격 낮추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옛 기술로 수십년째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이 수두룩하다”며 “한전 입찰 관행을 탓하기 전에 이제는 산업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기술에 도전해 해외 시장에 공략에 나설 때”라고 말했다.
한국전력 발주 전자식전력량계 입찰현황 (자료:한국전력)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