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의 구속은 아직 인사와 올해 투자계획 등을 확정하지 못한 SK그룹에 적잖은 혼란을 줄 전망이다. `따로 또 같이 3.0` 체제가 출범하며 의사결정 권한이 수펙스추구협의회(그룹내 최고의사결정기구)와 각 계열사로 위임됐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계열사 사업에 힘을 북돋았던 최 회장의 부재로 그룹이 활력을 잃을 것으로 우려된다.
◇비상경영체제 가동 예상
우선 내달 초로 계획됐던 수펙스추구협의회 산하 5개 위원회 위원장과 일부 계열사 인사가 미뤄질 가능성이 커졌다. 5개 위원회는 따로 또 같이 3.0 체제 출범 이후 김창근 협의회 의장(SK케미칼 부회장)과 함께 분야별로 범그룹 의사 결정의 핵심 역할을 맡을 계획이었다. SK 한 관계자는 “일부 위원장의 경우 인선까지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다”며 “회장의 구속으로 기존에 구상했던 계획 대신 비상경영체제가 가동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투자 계획 확정도 미뤄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표면적으로는 김 의장의 결재로 투자 계획을 확정할 수 있지만 글로벌 자원 개발이나 반도체 설비투자, 주파수 계획 등은 오너의 결단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다. 앞서 SK그룹에서는 17조원 안팎의 투자 계획이 외부에 알려지기도 했다. 한 관계자는 “대선 시즌과 함께 조기에 투자 계획 틀을 잡긴 했지만, 회장의 부재에 따른 영향으로 시일이 걸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룹 계열사 경영에도 악영향 불가피
계열사 중에서도 글로벌 시장 확장에 힘을 쏟고 있던 SK에너지·SK이노베이션·SK하이닉스와 최 회장이 지분 38%를 보유한 SK C&C가 오너 부재에 따른 타격을 더 많이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일단 의욕적으로 진행해왔던 해외자원개발(E&P) 등 해외 에너지 사업에서 상당부분 제동이 걸릴 것으로 우려된다. SK는 그 동안 최 회장의 마당발 외교활동에 힘입어 터키 화력발전소 건설사업, 콜롬비아 에너지와 자원개발사업 진출, 아제르바이잔 진출 등 해외 사업을 추진해왔다. 정유부문에서는 안정적인 원유 도입에 알 팔리 사우디아람코 회장 등과 인맥을 갖고 있는 최 회장의 부재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해외자원개발 사업을 담당하는 SK이노베이션은 올해 E&P사업부분을 독립시켜 회사 내 회사(CIC) 급으로 키우고 글로벌 M&A 등 사업에 속도를 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룹 최고 결정권자 부재라는 난관에 부딪치게 됐다. 자원개발사업 특성상 적게는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조 단위 이상의 자금 투자 결정이 따라야 한다. 오너의 `의지`가 필요하다.
◇최재원 부회장 역할 커질 듯
3월 이후 업황이 개선될 것으로 예상된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SK하이닉스는 최 회장의 부재가 큰 악재다. SK하이닉스는 D램 시장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낸드 플래시 시장에서는 4위 업체에 불과하다. 빠른 의사결정으로 후발업체의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치킨게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시기에서 자칫 실기한다면, 그 수혜를 삼성전자 등 경쟁사가 점유할 수도 있다.
SK텔레콤 역시 내주 인사와 연간 매출 목표·투자계획 발표와 정부의 주파수 광대역화 계획 확정을 앞두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다. SK텔레콤 한 관계자는 “인사 시기가 확정된 건 아니었지만 다음 주 시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며 “최 회장의 구속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10년 전 최 회장이 구속됐을 때보다는 훨씬 견고한 대비 태세를 갖춰 놨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재원 부회장의 무죄 판결 또한 불행 중 다행이라는 분위기다. 재계 한 관계자는 “최 회장이 법정 구속됐다고 해도 총수의 지배력이 여전한 상황에서 전문경영인이 그룹 경영상의 전권을 행사하기는 힘들 것”이라며 “아무래도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의 역할이 커지지 않겠나”고 말했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 함봉균기자 hbkon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