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 대통령 당선자를 존중하며 그가 우리를 단결시켜 헌법이 수호하는 위대한 비전을 실현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도울 것이다”
지난 2000년, `대혼돈(chaos)`이라 불리며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국 대선은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선거로 꼽힌다. 1억 명 가까운 전체 유권자 투표에서 앨 고어가 조지 부시보다 33만 표를 더 얻었다. 하지만 21세기 미국을 이끌 첫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은 부시였다. 플로리다주에서 537표 차이로 패한 고어는 투표에서 이기고 선거에서 지는 불운아(?)가 됐다. 미국 선거제도는 주별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한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기 때문이다.
한 달 넘게 계속된 개표논쟁 끝에 연방대법원이 플로리다주에 대한 수검표가 비(非)헌법적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부시가 미국 43대 대통령으로 확정된다. 고어는 연방법원의 결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법원 청사 앞에 시위대 수천 명이 모였지만 단 한 건의 물리적 충돌도 없었다. 고어 지지자들은 부시를 `대통령(President)`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지칭할 때 `P`자를 뗀 채 단순한 `백악관 거주자(Resident)`로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고어는 “도전이 시작됐을 때는 맹렬히 싸우지만 결과가 나왔을 때는 서로 단결하고 화합해야 한다”라며 당당히 패배를 인정했다.
비록 심정적으로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그들은 국민과 헌법이 최선의 판단을 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에 반발하며 일방적으로 선거판을 깨려 들지 않았다. 주어진 권한과 틀 안에서 갈등을 해결하려 노력했다. 끔찍한 실망 속에서도 패배의 상실감을 누르고 `공명정대하게 싸웠으니 이것으로 됐다`라면서 결과에 승복했다. 선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상대방을 흠집 내려는 태도는 없었다. 오히려 당파적인 논쟁보다 지도자로서 초당적인 협력의 손길을 내밀었다.
지난 수년간 우리도 크고 작은 선거를 치렀다. 그 과정에서 우리 정치권은 매번 몸살을 앓았다. 승자와 패자가 진심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신뢰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 사회가 성공에 목숨 걸며 스스로를 너무 다그쳐온 결과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한방으로 결판나는 사회(The one-shot society)`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에서 “모든 것이 단 한방에, 성패가 결정되는 분위기에서 한국인들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꼬집었다.
누구나 살다 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이길 때 아름다워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승리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몰리고 찬사가 따라온다. 그러나 제대로 이기려면 경쟁자들까지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저는 매달 받은 편지들 중 가장 적대적인 내용을 보내준 열두 명의 시청자를 뽑아 점심식사에 초대합니다.” 미국 TV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의 말이다.
2012년 오늘, 우리는 새 대통령 당선자를 만난다. 동시에 여러 명의 낙선자가 탄생한다. 누가 뭐래도 선거에서 패배하면 당장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박빙의 판세 속에 서로 끝까지 승리를 장담한 만큼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을 다스려야할 시간이다. 세상은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 그래서 당선자만큼이나 낙선자에게도 큰 책임이 따른다. 선거기간 동안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했던 모습을 이제 접어두자. 진심이 아니라도 좋다. 대한민국 미래와 국민적 단합을 위해 낙선자가 먼저 `우리 하나가 되자`고 외쳐주길 바란다. 싸움에서 지고도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주상돈 벤처경제총괄 부국장 sd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