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SK그룹이 발표한 `따로 또 같이 3.0` 원칙은 파격 그 자체였다. 핵심은 계열사별 자율 책임 경영이다. 그룹이 계열사 의사 결정과 임원 인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니. 총수 일가가 전권을 휘두르는 우리나라 재벌 관행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다른 그룹의 미래전략실이나 지주회사를 떠올리면 또 다른 극단으로도 비친다.
최태원 SK 회장이 오래전부터 지닌 의지의 표현이라고 한다. 과거 재벌가에서 보지 못했던 시도라 배경이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최 회장이 선고 공판을 앞두고 재벌 개혁에 앞장서 우호 여론을 조성하려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의도가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과연 진정성이 있는지, 계열사 지배구조를 실제로 바꿀 수 있을지도 마찬가지다. 의도의 순수성이나 계열사 책임 경영 체제의 성패는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결과의 책임도 전적으로 SK의 몫이다. 다만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하나 걸리는 대목이 있다. 삼성과 더불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대표하는 SK하이닉스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983년 현대전자산업을 모태로 출범한 뒤 지난 30년간 말 그대로 극한 부침을 겪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직후 반도체 빅딜, 2000년대 사명 변경, 그룹 계열 분리, 채권단 공동 관리 체제 등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주인 없이 살다 지난해 맞은 새 주인이 SK다. 생존력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SK하이닉스가 날개를 새롭게 펼 기회가 왔다.
SK하이닉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승리의 경험이다. 내성이 아무리 강한들 결국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 안간힘만 쓸 뿐이다. 어느 한 분야, 품목에서도 선두에 올라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이 회사가 절치부심해야 할 일이다. 채권단 관리 아래 선행 개발과 양산 투자를 못했다는 점을 이해해도 말이다.
이제 최 회장이 따로 또 같이 3.0을 실천하겠다고 공언했다. SK하이닉스로서는 책임 경영의 전권을 이양하겠다는 뜻보다 `책임`이 더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오랫동안 익숙했던 단기 실적·재무 관리에 치중하고 주변 눈치만 보는 식으로 또다시 갈 수도 있다. 내년 위기 상황을 1등이 될 기회로 삼기보다 어떤 시도조차 못할 공산도 엿보인다.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결단으로 성장 기틀을 마련한 삼성 반도체를 보자. 최고경영자(CEO)가 단기 실적에 급급했다면 지금의 삼성 반도체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 회장의 신경영 실험이 SK하이닉스에 `모험`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막 상승 탄력을 받은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세계 초일류로 올려놓기 위해 지금은 체력을 더 기를 때기 때문이다.
서한 소재부품산업부장 h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