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TV 등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차지하는 품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른바 첨단 산업으로 불리는 영역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가 첨단 산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20여년 전부터 계획하고 실행해온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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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발은 첨단기술산업 육성 장기계획을 꼽을 수 있다. 첨단산업 육성 5개년 계획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정책은 1989년 시작됐다.
당시 정부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5년 동안 26조원을 투자해 반도체·컴퓨터·통신기기·항공우주·신소재·로봇·생명공학 7개 첨단 기술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곧 주무부처인 상공부(현 지식경제부)는 제1차 첨단기술산업발전심의회를 열고 첨단기술산업 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7개 분야별 실무분과위원회가 구성됐으며 각계 25명 전문가가 위원으로 참여했다. 실무 작업은 산업연구원(KIET)이 총괄하기로 했다.
첨단산업단지를 위해 450만평의 공간을 조성하고, 40만명 인력을 투입하는 등 이례적인 수준으로 정부는 지원에 팔을 걷어붙였다. 첨단산업을 집중 육성해 2000년대에는 첨단제품 수출 비중을 40%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였다. 1987년 반도체·컴퓨터 등 첨단산업 수출 비중은 11.1%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공격적인 목표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3저 효과를 기반으로 고성장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기술집약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상공부는 수도권 지역에 150만평 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대구·광주·대전·전주·진주·청주·춘천 7개 지역 도시에 250만평을 할당했다. 나머지 50만평은 용도 지역을 변경해 자유입주로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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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첨단기술 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당연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이같이 방대한 투자를 단행할 수 있을 정도로 역량 있고 위험을 부담할 수 있는 기업이 드물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듬해 정부는 첨단산업육성 특별법제정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특정 산업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경제기획원이 특정 부분에 편중 지원하는 것은 오히려 경쟁을 통한 산업발전을 저해한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첨단산업육성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무산되고 말았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을 앞두고 특별법 제정에 따른 통상마찰을 우려한 것이었다.
첨단기술산업 육성 장기계획이 비록 반쪽짜리 정책에 그치고 말았지만, 거둔 성과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는 글로벌 무한경쟁시대가 열리는 동시에 환경라운드 및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는 격변기였다. 첨단산업 육성 5개년 계획 수립을 계기로 정부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을 목적지향적으로 개편하고, 연구개발(R&D) 투자를 계속 확대했다.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국가연구개발사업을 늘리고, 연구개발비를 확대함에 따라 투자 효율성과 연구생산성 제고 문제가 표면화됐다.
여러 문제가 개선되면서 정부는 민간과 협력해 체계적인 연구사업 기획 및 관리를 하면서 국가연구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신규사업을 위한 기획이 폭넓게 논의됐고, 효율적인 사업 및 연구관리 평가 제도도 확립됐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생산성 제고와 개혁 추진 등으로 연구 경쟁력을 제고하면서 다양한 시책을 전개했다.
1990년에는 정부 부처 간 역할분담을 위해 산업기술발전 기본계획이 만들어졌다. 이에 근거해 과학기술처는 △원천·핵심 첨단기술 △복합기술 △국제공동연구 △기초연구 등 국가 기술개발의 큰 줄기를 담당하게 됐다. 통상산업부 등 산업관련 부처는 산업구조 조정 및 대외경쟁력 향상을 위한 첨단산업기술, 중소기업 현장애로기술 및 품질향상 관련기술 등을 맡게 됐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은 분산형 기술개발 시스템에 따라 공급 중심 기술개발과 수요 중심 기술개발이 조화롭게 추진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이때 만들어진 기획안은 지역 균형 발전, 혁신 클러스터, 그린 IT 등 산업 육성을 위한 기본 골격으로 활용돼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인력 수급과 과제 조정 능력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아
1989년 당시 첨단기술 산업 육성 장기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것은 인력 문제 탓이다. 예산은 어떻게든 마련한다고 해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전문 인력이 국내에 없었다.
과학기술처가 당시 조사한 첨단기술인력 수급동향에 따르면 1991년에 박사 630명, 석사 500명이 모자라는 것으로 조사됐다. 첨단기술산업이 본격화되는 1992년부터는 인력 부족이 더욱 심화됐다. 2001년까지 박사 1만3900명, 석사 3만9500명, 학사 15만2000명 등 총 20만명가량이 부족한 것으로 분석됐다.
우선 당시 인력양성 시스템으로는 전문인력을 키워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수요처인 산업계와 공급기관인 대학 사이에 연계활동이 부족했던 탓이다. 또 1988년 당시 이공계학과 114개 중 첨단기술 관련학과는 45개에 불과했다. 이공계 대졸자 취업률은 60% 수준에 머물렀지만, 첨단기술 전공자는 부족한 기현상이 벌어졌다. 고학력자가 넘쳐나는 가운데 필요한 인력은 부족한 사태는 첨단 산업뿐 아니라 당시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신기술 전문 재교육기관이 없었고, 기업들도 필요한 인력을 자체적으로 양성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정부는 산업과 대학 간 협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대학 정원 조정 때 소프트웨어·통신공학·메카트로닉스·광전자 등 첨단기술 관련 학과는 증원을 허가하는 파격적 혜택을 내걸었다. 산업 수요가 많은 관련 학과는 대학원 입학 정원을 과감하게 늘려줬다.
첨단산업 육성에는 예상보다 훨씬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됐다. KAIST를 산업 분야 석사 전문 양성기관으로 키우고, 대덕으로 이전한 후 홍릉 캠퍼스를 민간과학기술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정부는 대학원 석·박사급 인력을 정부출연연 연구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 내 기술대학원을 운영토록 하는 정책도 구상했다. 다만 상공부·경제기획원·문교부 등 관계 부처 간 주도권 싸움이 심해 협력이 잘 되지 않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정부는 범부처 차원에서 과학기술진흥회에 힘썼다. 대통령 과학기술자문회의가 수시로 열렸고,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 핵심 전략으로 삼으려는 기술 관료들의 발언권이 컸다. 그러나 상공부·과기처·체신부 등 관련 부처들이 저마다 비슷한 내용의 연구계획을 마련하면서 진통을 겪기도 했다.
특히 상공부와 과기처는 연구개발 사업화 계획 주제가 거의 같고, 과제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중복된 경우가 많아 문제가 심각했다. 원천 기술 개발을 주창하는 과기처와 산업화를 부르짖는 상공부는 때때로 부딪혔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가 비일비재해지면서, 범부처 차원에서 첨단기술 산업을 육성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졌다. 지금과 같은 조정 시스템이 장착된 것은 과거의 경험 덕분인 셈이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