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은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무척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사회는 물론이고 산업계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을 뭔가가 필요했다. 정부 차원에서 이를 찾기 위한 고민을 지속했고, 그 중심에는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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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간전산망 추진 전략 체계

당시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에서는 홍성원 비서관과 정홍식 행정관(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사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사회생활 전반의 정보화 촉진과 정보통신산업 육성으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각 분야 전문가 모임을 열어 의견을 수렴하며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밑그림을 그려나갔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이라는 용어는 1983년 9월부터 공식문서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3년은 과학기술처가 정한 `정보산업의 해`라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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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

◇기업·기관별 전산화 추진 교통정리 필요=하지만 당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전산화와 정보화를 본격화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국내 정보산업 기술이나 시장성이 크게 부족했고, 경제성도 확실치 않았다. 기업투자를 이끌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 부처 단위 또는 민간기업 차원에서 개별적인 전산화는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은행·증권사·출연연구소 등에서 온라인 업무와 행정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크고 작은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다. 대규모 중복 투자가 발생했고, 표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호환도 되지 않았다. 효율성이 떨어지고 자료 활용에 제한이 많았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대부분 외국에 의존해야 했다. 전산화를 촉진하면 할수록 국부유출이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실은 이 문제를 자체 능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전문가들도 이에 동의했고, 이는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장기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문제 해결은 물론이고 국가차원에서 경제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표와 전략을 짜 나갔다. 결국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하나하나 극복해 가는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국산화가 관건=이들은 세 가지 추진 전략을 세웠다. 첫 번째는 선진국의 시행착오를 피하고, 후발주자의 이점을 살리는 데 필요한 추진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국가기간전산망 구성과 운영에 사용될 기본 시스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국산화하고, 통신 네트워크도 우리에게 적합한 정보고속도로 개념으로 건설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는 국내 정보통신산업 육성 발판을 제공하게 된다.

두 번째는 컴퓨터 이용자와 제공자 또는 관리자를 구분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각 기관 전산실 컴퓨터 담당자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등 모든 정보화 수단과 전산화 업무 내용을 관리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전문성을 높이기 어렵다고 판단, 이용자는 이용만 하고 정보화 수단은 전문기관이나 기업이 제공해 전문성을 높인다는 원칙을 정했다.

세 번째 추진전략은 최소한 `기본 시스템`만큼은 우리 자본과 기술로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각 기관과 망들의 호환성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기준과 표준을 국가 차원에서 규정하고, 이 범위에서 큰 무리가 없이 호환되는 모든 국내외 전산시스템에 국가기간전산망의 문호를 개방했다. 자율성과 다양성을 보장하고 기술발전과 경쟁요소를 동시에 수용한다는 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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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홍성원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국가기간전산망' 구성과 운영에 대한 각계 의견 청취계획 보고서. '국가기간전산망'이라는 용어가 정부 공식문건에 처음 사용됐다.

◇청와대 내 정보산업 육성 조직 가동=국가기간전산망 사업 기획과 정책방향은 전산망조정위원회에서 맡았다. 우선 1981년부터 청와대 내부기구로 운영되고 있던 반도체공업육성위원회를 확대 개편해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를 띄웠다. 1983년 7월의 일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위원장을 맡고, 각 부처 차관급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그해 9월부터 230개 공공기관과 70여명의 관계 전문가 의견을 수렴, 12월에 대통령에게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중간보고를 하기에 이른다.

중간보고서에는 △국가기간전산망을 행정망·금융망·교육연구망·국방망·공안망의 5대 전산망으로 나눠 개발·운영하고 △총무처·과학기술처·상공부 등에 나뉘어 있던 공공기관 컴퓨터 도입 허가를 정보산업육성위원화가 일괄 처리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듬해인 1984년 6월.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로 명칭을 변경,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과 공공기관 컴퓨터 도입 업무를 전담하게 된다. 다른 업무는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신설한 기술진흥심의위원회로 넘겼다.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는 1985년 5월에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이후 1986년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1987년 7월 국가 정보화의 근간이 될 `국가기간전산망 통합 구축계획`이 발표된 이후 본격 추진된다.

◇세계 최고의 IT 인프라 갖추는 계기로=국가기간전산망 추진체계는 1987년 정권 교체 시기와 맞물려 청와대 주도에서 각 부처 중심으로 이전된다. 전산망조정위원회도 청와대에서 체신부 소속으로 옮겼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행정전산망 구축과 국산 주전산기 및 슈퍼컴퓨터 개발 프로젝트까지 이어지는 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을 이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990년대 지방정부와 공공기관까지 확대된 정보사회종합대책, 1996년에는 민간 부문을 포함한 범국가적인 정보화추진기본계획으로 이어졌다.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우리나라 정보화와 정보산업 발전을 아우르는 핵심 연결고리가 된 셈이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특히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인터넷을 빨리 수용하고 소화할 수 있게 해 준 요인이 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이 축적해 놓은 인프라와 마인드 효과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사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사업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세계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빌 게이츠와 로스페로 등 미국 정보산업계 거물들도 사업참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다. 국가기간전산망 구축 사업은 바로 우리나라를 IT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토대를 세운 초석이었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