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98] 팬택 워크아웃 졸업 <2011년 12월>

2011년 12월 7일 팬택 채권단이 팬택 기업개선작업 졸업안에 전격 합의했다. 지난 2007년 4월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지 4년 8개월 만에 팬택 경영이 정상화되는 순간이었다.

[100대 사건_098] 팬택 워크아웃 졸업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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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채권단 기업개선작업 졸업 합의 소식 이후, 팬택 주요 임원진이 모여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을 다짐했다.

`한국 벤처기업 신화` `한국 휴대폰 산업의 역사`로 불리던 팬택은 기업개선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오뚝이 경영`이라는 새로운 별칭을 부여받았다.

팬택은 1991년 박병엽 부회장과 직원 6명의 작은 기업으로 출발했다. 무선호출기를 첫 사업 아이템으로 정한 팬택은 관련 시장 성장세를 등에 업고 빠른 속도로 덩치를 키워나갔다.

팬택은 당시 해외 기업 제품이 판치던 국내 무선호출기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국내 소비자에게 최적화된 사용자 환경은 팬택의 경쟁력이었다.

팬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진출했다. 경쟁사 제품에 없는 기능과 한발 빠른 신제품 출시를 앞세워 차별화를 시도했다. 문자 호출기, 보이스 호출기, 광역 호출기 등 다양한 제품이 팬택에서 나왔다.

팬택은 창업 이듬해 매출 28억원을 올린 데 이어 1993년 98억원을 기록했다. 1994년에는 매출 300억원을 바라보는 규모로 성장했다.

여기에 안주했다면 지금의 팬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팬택은 무선호출기 시장 성장세가 둔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선제적으로 움직였다. 휴대폰, 무선전화기, 산업용 무전기 등 다양한 이동통신기기 사업을 검토했다. 그 가운데 휴대폰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휴대폰 연구개발 인력을 대폭 늘린 팬택은 PHS, GSM, CDMA 등 다양한 단말기를 개발하며 영역을 넓혀나갔다. 옛 LG정보통신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휴대폰을 생산, 공급했다.

기술력을 인정받은 팬택은 1998년 모토로라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세계적인 휴대폰업체가 한국의 작은 기업과 손잡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였다.

팬택은 모토로라만을 위한 CDMA 단말기를 개발해 모토로라 상표로 판매하기로 했다. 연간 3억달러에 이르는 수출량이 보장됐다. 모토로라에서 투자금도 유치했다.

팬택은 2001년 현대큐리텔, 2005년 SK텔레텍을 각각 인수하며 성공 신화를 멈추지 않았다. 팬택은 한국 시장에서 삼성전자·LG전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해외에서도 50여개국에 제품을 출시하는 등 글로벌 휴대폰업체로 자리매김했다.

휴대폰 사업 성공에 힘입어 2005년 팬택 매출은 3조원을 넘어섰다. 1992년 28억원에서 13년 만에 100배 이상 매출이 늘어났다. `한국 벤처 신화`라는 명예가 뒤따랐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ICT) 업계에 영원한 성공 스토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 파트너였던 모토로라가 일으킨 `레이저` 열풍이 팬택에는 판매 부진, 재고 부담, 유동성 악화로 이어졌다. 부도 위험까지 겪어야 했다.

결국 팬택은 2006년 12월 채권단에 기업개선작업을 요청하기로 했다. 팬택은 5개월 뒤 기업개선 절차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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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4년 8개월간 치열한 생존 경쟁이 전개됐다. 팬택은 사업구조, 조직, 경영 모두 생존에 맞춰 바꿔나갔다. 외부 환경 변화에 대비해 한발 앞서 준비하고 대응하는 시나리오 경영을 펼쳤다.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주력했다. 기업 회생을 염려하는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임직원들도 하나로 뭉쳐 노력했다.

곧 성과가 나타났다. 팬택은 기업개선작업 이후 연속 흑자행진을 이어나갔다. 애플 `아이폰`으로 촉발된 휴대폰 시장의 스마트폰 바람은 팬택에 새로운 기회로 작용했다. 빠르게 스마트폰 사업에 집중한 팬택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마트폰 사업 초기 너무 빨리 피처폰 비중을 낮추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지만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팬택 스마트폰 판매량은 불과 1년 사이 7배나 늘어났다. 한국을 방문한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빠른 스마트폰 판매량 신장세에 놀라움을 표시할 정도였다.

기업개선작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실적 호조가 이어져 팬택 부활을 점치는 분위기가 무르익던 2011년 12월 6일. 이때 박 부회장이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박 부회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팬택 경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독한 격무로 인한 신체·정신적인 피로`가 표면적인 사퇴 이유였다. 이면에는 기업개선작업 완료에 대한 채권단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포석이 깔려 있었다.

이에 채권단은 팬택 정상화와 박 부회장 복귀 주문으로 답했다. 박 부회장 사퇴 회견 하루 뒤 산업은행을 비롯한 11개 금융기관으로 이뤄진 팬택 채권단은 2138억원 규모 워크아웃 채권을 신디케이트론으로 전환하는 기업개선작업 졸업안에 합의했다. 채권단은 박 부회장 경영 복귀를 바란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후속 조치는 빠르게 이어졌다. 박 부회장은 사퇴 의사를 공식 철회했다. 팬택은 2012년 창립 이후 처음으로 4조원대 매출 목표를 수립했다. 스마트폰 1300만대 판매라는 공격적인 계획도 세웠다. 사실상 `제2의 창업` 선언이다.

박 부회장은 2012년 1월 신년회에서 “허영과 자만을 걷어내고 잘못된 점을 고칩시다. 5년 전 워크아웃에 돌입하던 당시로 돌아가 정신을 재무장합시다”고 강조했다.

기업개선작업을 마친 지 1년이 되가는 2012년 가을, 팬택 성공 스토리는 현재 진행형이다. 팬택은 자본금 4000만원 구멍가게로 출발해 무선호출기, 휴대폰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20여년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경험했다.

지금은 기업개선작업 졸업이라는 호재를 계속 이어가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팬택이 경영 정상화를 넘어 제2, 제3의 도약을 이끌어낼지 국내외 ICT업계와 수많은 후배 벤처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팬택의 도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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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택의 상징` 박병엽 부회장

◆`팬택의 상징` 박병엽 부회장

팬택하면 모두들 박병엽 부회장(50)을 떠올린다. 순서를 바꿔 `박병엽`이라는 이름 석 자를 봐도 팬택을 연상한다. 팬택이 박병엽이고, 박병엽이 곧 팬택인 셈이다.

전북 정읍 출신인 박 부회장은 1980년대 후반 맥슨전자에 근무하면서 무선통신기기와 연을 맺었다. 맥슨전자 영업 업무를 담당했던 박 부회장은 1991년 스물 아홉 나이에 서울 신월동 곰달래길 작은 사무실을 무대로 팬택을 창업했다. 당시 박 부회장이 집을 팔아 마련한 4000만원이 창업자금이었다.

창업 이후 박 부회장은 중대한 순간마다 과감하고 공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잘나가던 무선호출기 사업을 접고 휴대폰이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진출하는 순간이 그랬다. 자체 브랜드를 포기하고 모토로라와 손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큐리텔, SK텔레텍을 인수한 것에서도 박 부회장 특유의 저돌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박 부회장은 승부사로도 불린다.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때는 “회사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빈손으로 나가겠다”고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기업개선작업 졸업에 임박해서는 “팬택을 떠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둘 다 박 부회장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사례다.

일에 있어서는 `워커홀릭` 수준이다. 2011년 말 사퇴 선언 시 건강 악화를 표면적인 이유로 내밀었지만 없는 말은 아니었다. 박 부회장은 기업개선작업 돌입 후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고 한다.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경영자로 알려졌지만 직원들과 격의없이 지내는 `맏형 리더십`으로도 유명하다. 박 부회장은 생산현장 직원들과도 격식을 차리지 않고 어울린다.

박 부회장의 리더십은 2001년 하이닉스에서 분사한 현대큐리텔을 인수합병한 후에도 빛났다. 그는 1000여명에 달하는 현대큐리텔 임직원들을 일일이 만나 대화했다.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기존 팬택 직원들과 새로 합류한 직원들 간 인화를 이끌어냈다.

2007년 4월 기업개선작업 돌입 이후 4년 8개월간 팬택 임직원들이 흔들리지 않고 경영 정상화라는 한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것도 박 부회장 리더십의 힘이라는 평이다.

[표] 팬택 주요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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