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1시간을 달리는 동안, 해가 나는가 싶더니 다시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기를 몇 번 반복한다. 부쩍 잦아진 필리핀의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지난 달 초 열흘간의 폭우로 수도 마닐라의 60%가 물에 잠겼다 다시 복구 중인 마닐라 시내 하늘은 여전히 변덕스럽다. 이곳의 우기(6~9월)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재해의 계절이 되어가는 중이다.
지난 2009년 9월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온도이(Ondoy)`는 마닐라 시내 마리키나강 상류를 포함해 주변 도시까지 포함하는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 전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490만명의 시민이 수해 피해자가 됐다. 필리핀 정부가 재해 예방 및 조기 경보시스템 구축을 위해 한국 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이 때다.
온도이는 그나마 남아있던 기상 관측 장비들을 휩쓸어갔다. 수도권 전체 재해 예·경보 시스템이 마비됐던 것이다. 이듬해인 2010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국내에서 관련 시스템 개발 경험을 갖춘 SK C&C와 메트로 마닐라 지역에 기상 관측 시설을 새롭게 세우고 재해 조기경보 및 대응 시스템 구축을 시작한다. 한국기상청(KMC)은 사업 관리와 감리를 하는 프로젝트관리컨설턴트(PMC)를 맡는다.
◇필리핀, 온도이 강타 후…한국에 SOS=필리핀 최대 정치·경제 중심지인 메트로 마닐라 지역 상주인구는 약 1200만명에 달한다. 연간 20회 가량의 태풍과 2~5번의 홍수가 찾아온다는 필리핀의 기상 이변에는 예고가 없다. 1년 강수량이 2500mm로 한국의 2.5배다.
3년 전 온도이는 42년만의 기록적 폭우를 동반했던 수도 마닐라 지역이 90% 가까이 물에 잠겼다. 폐허가 된 도시 피해도 컸지만 문제는 갑작스런 폭우가 필리핀 전역에 점차 잦아들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달 초에도 우리나라 연간 강수량의 20%에 해당하는 비가 이 곳에서 하루만에 쏟아졌다.
온도이가 휩쓴 마닐라 지역은 재해복구 작업과 함께 재해 예방 및 조기 경보 시스템을 필요로 했다. 잦아지는 기상 재해로 피해가 늘어나고 있지만 특성상 미리 예측하기 어려워 빠른 파악과 순간의 대응이 강 유역 주민들의 생사를 갈라놓는 상황이었다. 막시모 페랄타(Maximo Peralta) 필리핀 기상청 과학&기술 부문 날씨서비스 주임은 “즉각적으로 상황을 인지함은 물론 이를 즉시 시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필리핀 기상청(PAGASA)은 파식-마리키나강 유역 등 메트로 마닐라 주요 범람 지역을 중심으로 쓸려나간 관측 장비를 재구축하고 시민들이 홍수 가능성을 사전 인지할 수 있는 조기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한다. 2010년 사전 조사 작업이 진행된 이후 12월 한국국제협력단은 SK C&C로 사업자를 선정하고 이듬해 7월 시스템 구축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 2월 완료됐다. 완료 예정시기였던 8월보다 6개월 가량 앞당겼다.
◇기상 정보 수집 및 실시간 분석…재해 대응 체계화=10분 단위 기상 관측 및 예측부터 모델링, 예·경보, 통신 전반에 이르는 재해 대응 통합 시나리오에 따라 △데이터 수집 시스템 △홍수 예보 시스템 △조기 경보 시스템 △라디오 통신 네트워크 등이 개발됐다. 페랄타 주임은 “기존에 `웽~` 하고 단음으로만 존재하던 홍수 알람 경고음이, 수위 정도에 따라 세 가지 다른 소리로 울릴 수 있게 됐다”면서 “예컨대 수위가 100%일 때 대피를 해야 한다고 치면, 60%와 80% 수위일 때 각기 다른 경보음이 미리 울리게 된다”고 말했다.
데이터 수집 시스템은 각 지점에 설치된 디지털 자동기상관측장비(AWS)와 우량계(RG, Rain Gauge Network), 수위계(Water Level Gauge Network)를 포함해 이들이 보내주는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서버 및 DB, 스토리지로 구성됐다. 홍수 예보 시스템은 AWS가 보내준 데이터를 관리하는 시스템과 실시간 모니터링 및 분석해 홍수 상황을 사전 감지할 수 있는 기능이 골자다. 조기 경보 시스템은 수위에 따라 세 가지 경보를 울리고, 시민들의 대피를 권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와 함께 20개의 경보장치(WP, Warning Post)가 설치됐으며 수위가 높아지면 기상청 PC에서 이를 모니터링하고 경보를 울리거나 끌 수 있다.
라디오 통신 네트워크는 VHF 통신을 기반으로 4개의 AWS, 7개의 우량계, 10개의 수위계, 그리고 20개의 경보장치가 상호 네트워킹되도록 한 것으로, 비상시 GSM 방식으로 통신할 수 있는 백업 체계까지 갖췄다. 너대니얼 세르반도(Nathaniel Servando) 필리핀 기상청장은 “지난 7월 발생한 폭우에도 이 시스템을 사용했으며, 남서계절풍과 열대 태풍 `헬렌`이 왔을 때도 사용됐다”면서 “실시간으로 수위를 온라인으로 모니터링 가능하게 됐다는 점이 큰 효과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양광 활용 친환경·초격차 기술 구현=수위계가 보내 온 정보는 강의 범람 정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 경보를 하는 데 쓰인다. 수면이 `일정 수위`을 넘기는지가 그래프로 표시돼 한 눈에 비상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10분마다 각 지역에 설치된 장비의 계측·계량 정보가 기상청으로 집계돼 실시간 모니터링 가능하며, 기상청 홈페이지에서도 이 정보를 확인할 수 있어 모든 공공기관과 단체, 시민 등이 이 정보를 활용해 국가적 위기 대응력이 높아졌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위험 수위 도달이 예상될 경우 조기경보시스템이 스스로 방재업무담당자에게 SMS를 보내 위험을 자동 통보한다. 담당자가 최종 판단해 홍수 경고 음성 및 싸이렌이 울리고 주민들에게 재빠른 대피 상황을 알린다. 페랄타 주임은 “시스템 구축이 `사전` 조기 경보이다 보니 측정으로 인해 수위가 조금만 올라가도 경보음을 울리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너무 이르게 울리는 것 아니냐`고 할 때도 있지만 위험 지역의 시민들이 미리 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수위 측정 및 계량 방식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해 나가면서 정확도를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AWS와 수위계 등 곳곳에 위치한 장비는 전기 없이 `태양광`으로 운영된다. 모바일과 차세대 기술, 실시간 통신 및 네트워크, 데이터 분석 기술이 재해 대응을 위해 어우러진 것이다. SK C&C를 프로젝트관리자(PM)로 해 진양공업주식회사, 한국토코넷주식회사, 회정정보통신 등 전문 국내 기업들이 공동으로 진출해 성공적인 사례를 일궈냈다.
마닐라(필리핀)=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