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 깊어질수록 기존의 앎에 상처는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알아갈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져 아픔의 강도는 더욱 심해진다. 그 아픔이 두렵다면 앎의 행로를 지금 여기서 빨리 멈춰야 한다. 그런데 앎 때문에 생기는 상처를 견디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그 상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지적 충격이 주는 즐거움의 고통이다. 삶이 공부고 공부가 삶이라면 공부나 삶이나 상처를 받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상처의 골이 깊을수록 깨달음의 깊이도 깊어진다. 깨뜨리면 얼룩이 생기고 깨달으면 무늬가 생긴다.
그런데 깨달음의 무늬도 깨뜨림의 얼룩 없이 생기지 않는다. 뭔가를 깨달으려면 스스로를 먼저 깨뜨려야 한다. 스스로를 깨뜨리지 않으면 깨진다.
깨지면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 깨지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한계와 굴레, 속박과 타성의 틀을 깨부숴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의 여정은 아픔의 연속이다. 앎의 무늬는 아름답지만, 앎의 얼룩은 아프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앎의 무늬지 아픔의 얼룩이 아니다. 그들은 앎의 무늬에 주목하고 앎의 얼룩은 쉽게 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면 알수록 아프다. 그 아픔의 진면목을 믿고 부단히 정진해야 아픔을 아픔으로 치유할 수 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처럼 이통치통(以痛治痛) 원리로 이전의 아픔을 다음의 아픔으로 치유하는 방법이다.
앎은 앓음이다. 앎이 성장하고 성숙할수록 몰랐던 사실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기존의 앎이 깨지는 심각한 통증이 수반된다. 그 통증을 감내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앎의 행로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앎의 행로를 부단히 전개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배움은 새로운 것을 아는 과정인 동시에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아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을 알면 알수록 기존의 앎이 허술하거나 부실한 앎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럴수록 더욱 앎에는 생채기가 생긴다. 그래서 앎은 기존의 앎에 심한 생채기를 내는 과정이다.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010000@hanyang.ac.kr
오피니언 많이 본 뉴스
-
1
5년 전 업비트서 580억 암호화폐 탈취…경찰 “북한 해킹조직 소행”
-
2
LG이노텍, 고대호 전무 등 임원 6명 인사…“사업 경쟁력 강화”
-
3
'아이폰 중 가장 얇은' 아이폰17 에어, 구매 시 고려해야 할 3가지 사항은?
-
4
美-中, “핵무기 사용 결정, AI 아닌 인간이 내려야”
-
5
5대 거래소, 코인 불장 속 상장 러시
-
6
삼성메디슨, 2년 연속 최대 매출 가시화…AI기업 도약 속도
-
7
美 한인갱단, '소녀상 모욕' 소말리 응징 예고...“미국 올 생각 접어”
-
8
아주대, GIST와 초저전압 고감도 전자피부 개발…헬스케어 혁신 기대
-
9
국내 SW산업 44조원으로 성장했지만…해외진출 기업은 3%
-
10
반도체 장비 매출 1위 두고 ASML vs 어플라이드 격돌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