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이슈]우주 라우터(IRIS)

# 1980년 스탠퍼드대학에 재학 중이던 렌 보삭, 샌디 레너는 공통 관심사에 푹 빠졌다. 연인 관계였던 이들은 늘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던 터라 이메일을 주고받기 힘들었다. 당시만 해도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근거리통신망(LAN)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멀리서도 사랑을 속삭이길 원했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페에서 해결책을 찾던 이들은 마침내 서로 다른 LAN을 이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아냈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라우터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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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부텔 시스코 부사장

풋내기 엔지니어 연인이 커피숍 냅킨에 끼적거렸던 아이디어가 세상을 바꿨다. 발신 데이터에서 수신처를 읽고 적절한 경로로 전달하는 라우터의 등장으로 네트워크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렌 보삭과 샌디 레너는 라우터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1984년 시스코를 설립한다. 목표는 간단했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시스코는 세계 네트워크 시장의 80% 가까이 점유하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확실히 2000년대 중반까지는 시스코가 걸어온 발자국이 네트워크 발전사로 그대로 남았다.

◇냅킨에 적은 아이디어, 우주로 날아가다=시스코는 2007년과 2009년 연달아 위성에 라우터 기능이 실린 보드 하나를 실어 우주로 날려 보냈다. 이 위성은 지금도 남미와 호주 사이에 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상이 아닌 대기권 밖에 데이터를 통제할 수 있는 장치(라우터)가 설치된 것이다. `아이리스(IRIS:Internet Router In Space)`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시스코가 최근 참여한 것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고 많은 돈을 쏟아부은 사업으로 평가된다.

하늘 높이 떠 데이터를 라우팅하는 아이리스는 원래 미국 국방부 주관으로 시작됐다. 사막·밀림 등 네트워크 인프라가 없는 오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전투 자원과 안정적으로 통신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군사목적에 무게를 뒀던 프로젝트는 민간으로 곧바로 확장됐다. 아직 단 하나의 위성만 가동되고 있지만 파급력과 가능성은 실로 놀랍다.

먼저 지상에 설치되지 않아 공간 제약이 덜하다. 지난 2010년 1월 아이티를 덮친 대지진에서 진가는 발휘됐다. 거의 모든 기반 인프라가 망가졌지만(원래도 빈약했지만) 아이리스는 대기권 밖에서 정보를 받아 첨단 의료기기를 갖춘 미국 병원에 현지 부상자 수술 장면을 전달했다. 단순히 정보가 아닌 미국에서 재난 현장의 수술 집도를 실시간으로 보고 코멘트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영상이었다. 아이리스 프로젝트가 현실성을 확보하는 순간이었다.

◇우주 라우팅, 우주통신망 건설 첫 걸음=아이리스 프로젝트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 것으로 추산된다. 일단 위성을 띄우려면 일반 기업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예산이 필요하다. 대기권 밖에 위치해 접근성이 무척 떨어진다는 점은 그동안 위성 통신 발전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었다.

미군 중장 출신으로 최근까지 미군 정보화 사업 최고 책임자였던 스티븐 부텔 시스코 부사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모든 통신수단이 인터넷프로토콜(IP) 기반으로 바뀌었는데 유독 위성만 뒤처져 있다”며 “사업 계약 후 발사까지 3년 이상 걸리는 시간과 고비용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상 장비에 비해 접근성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이런 불편함에도 위성 라우팅이 주목받는 것은 가능성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며 위치적 장점만 가졌던 위성에 무한한 가능성을 심을 수 있게 됐다. 시스코는 아이리스 프로젝트에서 소프트웨어 기반으로 설계된 라우터를 작은 보드에 실었다. 위성이 살아있는 한 원격 업데이트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미국 정부와 시스코는 실제로 2009년 상업 위성 IS-14에 라우터를 실어 우주로 날려 보낸 후 OS 교체 등 각종 업데이트를 궤도상에서 수행했다. 라우터는 서로 다른 통신망을 묶는 역할을 한다. 부텔 부사장은 “위성에 라우터가 올라가 있으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위성 통신을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작은 위성으로도 높은 처리율(스루풋·Throughput)을 낼 수 있고, IP 기반 네트워크를 우주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위치 특성상 여러 지상 경로를 거치지 않고 위성을 이용해 신속하게 멀리 떨어진 곳끼리 네트워크를 구성 할 수 있다. 지금처럼 끊기는 위성통신이 아닌 휴대폰 수준의 품질도 달성할 수 있다. 위성이 `Ka밴드(인공위성 고주파수 대역)`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며 2Gbps에 불과했던 tm루풋이 150Gbps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런 네트워크 기반 위에서 나올 수 있는 부가서비스는 무궁무진하다.

◇`행성 통신`, 꿈이 아니다=공상과학 영화를 보면 멀리 떨어진 행성, 그리고 우주 공간에서 통신이 무척 자유롭다. 아이리스 프로젝트는 이런 미래통신에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위성 라우팅이 그리는 미래는 머지않았다. 2011년 2월 TCS(TeleComunication System)는 시스코와 IRIS 솔루션을 운용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한 달이 채 못 돼 TCS는 DCI를 첫 번째 고객으로 영입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이렇게 우주 라우터 시대 막이 올랐다.

시스코는 앞으로 IP라우터를 탑재한 거대한 위성 망을 만들 계획이다. 청사진대로라면 지상 네트워크의 한계가 단번에 깨지는 혁신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은 지상 통신망을 보조하는 수단이지만 우주 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이런 기술이 행성과 행성, 더 나아가 우주와 우주를 잇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초석이 될 전망이다.

서로 이메일을 교환하고자 라우터를 고안했던 렌 보삭과 샌디 레너는 시스코 창립 이후 결혼했고 그리고 얼마 안 가 이혼했다. 둘의 관계는 끝났지만 이들의 로맨스가 만들어 낸 아이디어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나아갔다.

1980년 렌 보삭과 샌디 레너는 자신들이 생각해낸 장치가 어떤 가능성을 품었는지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단지 사소한 필요에 의해 만들었던 장치가 인류의 위대한 발전을 견인했다. 진화는 늘 이렇게 이뤄진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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