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의 디지털 확대경]진화에 끝이란 없다

외국 출장 때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번화가 유명백화점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계속 된 습관이다. 백화점 내에서도 전자제품 매장이 최종 목적지다. 쇼핑 목적은 아니다.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나라 전자제품이 세계 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 지가 궁금했다. 결과는 늘 실망이었다. 매장 목 좋은 자리는 늘 소니 TV의 몫이었다. 우리 제품은 매장 구석에 놓였다. 일본 TV와 국산 TV 가격 차이도 컸다. 일본 제품은 고급, 한국 제품은 중저가로 취급됐다.

2003년 중국 출장에서는 상황이 좀 나아졌다. 몇 년 사이 한국 제품은 눈에 잘 띄는 곳으로 옮겨졌다. 가격 차이도 상당히 좁아졌다. 한국 제품에 대한 고객 반응을 매장 직원에게 물었다. 결과는 또 실망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한국 제품 주제에 값도 비싸서 안 팔린다”는 설명이다. 물론 거기에는 소니를 추격 중인 한국 제품을 평가절하 하고픈 심리도 작용했을 법하다. 그렇게 소니는 굳건한 최고급 브랜드 이미지로, 세계 TV 시장을 호령하고 있었다.

수년 후 전세는 역전됐다. 소니는 2006년 삼성전자에 TV시장 1위 자리를 내줬다. 소니는 그 후에도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2008년 소니는 14년만에 적자를 냈다. 이듬해 소니는 1만6000명을 감원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래도 적자는 이어졌다. TV 사업만 놓고 보면 지난해 2300억엔(약 3조3200억원) 손실을 봤다. 8년 연속 적자다. 몰락하지 않으려면 TV 사업을 포기하라는 처방전도 받았다. 치욕적이다.

1970~80년대 우리나라 가전업계 입장에서 소니는 영원히 넘지 못할 산이었고 반드시 닮고 싶은 롤모델 이었다. 그런 소니가 휘청거린다. 지난해 소니는 다시 5200억엔, 우리 돈으로 7조2800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봤다. 창사 이래 최대치다. 급기야 소니는 지난 주 1만명 감원 계획을 내놨다. 전체 직원의 6%에 해당한다.


세계 PDP TV 시장에서 군림하던 파나소닉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적자 추산금액은 7800억엔(약 10조9300억원). 산요 인수로 적자규모는 애초 예상의 두 배가량으로 늘었다. 65년 간 일본 가전 역사를 써왔던 산요도 파나소닉에 합병되면서 브랜드까지 포기했다. 파나소닉과 산요는 삼성전자를 키워낸 스승이다. 두 회사는 1970년대 삼성 임원의 필수 연수코스였다. 그들은 삼성의 TV 사업은 물론이고 반도체 사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20세기 중후반 세계 시장을 쥐락펴락하던 일본 대표 전자 기업들이지만 지금 체면이 말이 아니다. 불과 수 년 사이의 변화다. 긴 전자산업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다. 그들이 급변하는 현실을 바로 읽지 못했고, 이에 적극 대처하지 못해서일까. 절대 아니다. 그들은 외부 변화에 내부 혁신으로 맞섰다. 그러나 힘이 달렸을 뿐이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장기불황, 2008년부터 본격화된 엔고현상, 1995년·지난해 대지진 등 악재는 산업계의 혁신 노력을 무위로 돌려놨다. 이 상황이 우리에게 닥쳤다면 어찌됐을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배경이야 어찌됐건 우린 변화에 적응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살아남는 것은 강한 종도, 지능이 가장 높은 종도 아니며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하는 종”이라고 말했다. 생물학적 진화론은 153년이 지난 오늘날 산업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진화에 끝이란 없다. 진행 과정일 뿐 끝이 될 순 없다. 그래서 안심은 금물이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진화하지 않으면 시쳇말로 한방에 훅 간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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