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 시작과 끝<79>

ICU(1)

생성과 소멸.

정보통신 인재양성 산실이자 IT분야 특성화대학이었던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진 대학교다. ICU도 역사의 부침에서 생성과 소멸이란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ICU 설립은 ICT강국 개막을 알리는 희망의 서곡이었다. ICU 설립은 한 정치인의 주장이 소중한 밀알이 됐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ICU 개교는 한국ICT산업을 진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단명(短命)했다. 난산(難産)만큼이나 힘들게 개교한 ICU는 10년 만에 간판을 내렸다. ICU 간판을 내리는데도 정치인들 말이 방아쇠 역할을 했다. ICU는 논란 끝에 간판을 내리고 2009년 3월 KAIST와 통합했다.

정치인들의 혀끝에 ICU가 탄생하고 간판을 내린 것이다. 정치인의 말은 생사의 칼날이었다. 그들의 말에 ICU 시작과 끝이 달려 있었다.

모든 것은 한 때 일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ICT강국` `인터넷강국`이라며 세계무대에서 한국 ICT를 자랑하던 정부가 ICU를 문닫게 한 것은 기막힌 일이었다.

시계바늘을 과거로 돌려 ICU생성과 소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

1997년 2월 5일.

정보통신부는 1998년 3월 개교를 목표로 정보통신 분야 창의적인 고급인력 양성을 위한 정보통신대학원 설립 기본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정통부는 3월 중 대학원장 선임 및 교수채용을 거쳐 7월 중 교육부에 대학원 설립 인가를 신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보통신부는 2000년까지 대학원 설립 및 운영에 필요한 재원 1010억원 중 건설비 450억원과 준비금 40억원은 정부가 정보화촉진기금으로 충당하고 운영기금 400억원과 연구시설 120억원은 대학원 설립에 공동 참여하는 기간통신사업자와 민간정보통신업체에서 부담키로 했다.

참여기업에게는 공동연구센터 입주권과 연구프로젝트 참여권, 산학장학생 배정 및 학사운영위원회 참여권한 등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학사과정이 없는 대학원대학인 정보통신대학원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부설로 설립, 향후 별도 캠퍼스를 갖추어 학교법인으로 독립하기로 했다.

학생은 석·박사과정을 합해 매년 200명 정도를 모집해 총 600명 수준으로 운영하며 개교시에는 ETRI 연구실을 개·보수해 캠퍼스로 사용키로 했다.

또한 우수교수를 확보하기 위해 세계적 석학을 유치하고 연구실적이 탁월한 국내외 전문가를 교수요원으로 초빙하며 특히 산업계의 우수한 전문가들을 겸임교수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정보통신부는 정보통신대학원이 21세기 국가발전을 선도할 정보통신분야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중소기업을 위한 공동연구센터로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수년에 걸쳐 논의만 거듭했던 정보통신대학원 설립안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정보통신부는 오랜 숙원을 해결해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했다.

그동안 정보통신부는 대학원 설립을 위해 거의 매년 비슷한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다. 그것은 대학 설립 인·허가권을 가진 교육부가 학교법인 설립에 반대입장 인데다 유관부처간 협의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정보통신전문 인력 양성 대학설립 논의가 시작됐는가. 1980년대 체신부 시절부터다.

정보통신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전문대학 설립을 줄기차게 주장한 정치인은 민정당 국회의원인 조영장 의원(13·14대 의원. 국무총리 비서실장 역임, 현 밀레니엄인천 회장)이다. 그는 당시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여당 간사였다. 그는 처음에 전기통신대학 설립을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ICU 설립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다`는 성경의 구절처럼 그는 ICT강국 구현을 선도할 인재를 양성하는데 공헌했다.

체신고 출신인 그는 정기국회나 상임위에서 전문인력 양성을 여러 차례 강력히 주장했다.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회의록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1989년 3월 2일.

국회는 이날 오후 2시 146회 교통체신위원회를 열고 최영철 체신부장관(국회부의장, 통일부총리 역임, 현 서경대학교 총장)과 이해욱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체신부 차관 역임, 현 여행작가)을 출석시켜 업무 현황을 보고받고 정책질의를 벌였다.

순서에 따라 조영장 의원이 정책질의를 시작했다.

“정보화 시대로 가는 게 지금의 추세입니다. 정보화 사회는 필연적입니다.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는 1000명 가량을 해마다 공채하는 데 그렇다면 전문인력 양성계획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전기통신대학을 설립해 선진대학형으로 육성할 용의는 없습니까. 지금 국내에는 세무대학이나 경찰대학, 철도대학 등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 등도 전문통신대학에서 고급인력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전기통신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럴 계획이 없습니까.”

조영장 의원의 질의에 대해 당시 이해욱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사장은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조 의원님의 말씀처럼 전기통신공사는 통신학교와 같은 전문대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국의 전문대학과 대학교, 대학원에서 전기통신관련 학과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으므로 별도 대학을 설립하는 것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설립은 교육부 인·허가를 받아야 하고 부처협의도 해야 할 사항이어서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단독으로 대학을 설립할 사안은 아니었다. 이해욱 사장도 조 의원이 주장하는 전문대학 설립취지나 원칙에는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딱 부러지게 확답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2개월여 후인 그해 5월 25일.

국회는 이날 오후 2시 146회 교통체신위원회를 소집해 현안 질의를 벌였다. 조영장 의원은 예외없이 전기통신대학설립에 관해 정책질의를 했다. 한번 질의한 사항에 대해 어물쩍 그냥 넘길 그가 아니었다.

조영장 위원은 체신부 장관을 향해 이 문제를 따지고 들었다.

“그동안 전문인력 양성의 시급성을 수차 말했습니다. 통신전문대학을 설립해 전문인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체신부 장관이 소신있게 대학 설립을 추진할 생각은 없습니까. 좌고우면하지 말고 소신있게 대학 설립을 추진해 주기 바랍니다. 장관의 입장을 말씀해 주세요.”

당시 체영철 장관은 IPU총회 참석차 출국하고 국내에 없었다. 최영철 장관을 대신해 상임위에 나온 신윤식 차관(데이콤 사장, 하나로통신 회장 역임, 현 정보환경연구원 이사장)이 답변에 나섰다.

“과거 체신부에 체신요원 양성소라는 전문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해방 후 체신고등학교와 체신대학으로 바뀌어 그동안 수천명의 유능한 인력을 배출했습니다. 그후 체신고등학교가 폐교됐습니다. 전문교육기관 설립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적극 검토해 보겠습니다.”

조영장 전 의원의 회고.

“무슨 일이든지 다 사람의 역량이 성과를 내는 것아닙니까. 정보통신 전문교육기관으로 학비전액을 국비로 지원했던 체신고등학교가 있었지만 9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문을 닫았습니다. 누가 다가올 정보화시대를 이끌수 있습니까. 그래서 IT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특성화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 당시에도 세무대학이나 경찰대학, 철도대학이 있었어요. 인재를 키우는 일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체신고등학교는 국비로 운영해 당시 전국의 가난한 집안 수재들이 몰려 들었다. 체신고등학교 총동창회는 2010년 2월 학교사(學校史) 펴냈다. 이 학교사에 따르면 국립체신고는 대한제국 당시 국가 예산으로 정보통신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전무학당과 우무학당에서 출발했다. 이어 일제강점기에는 체신이원양성소를 거쳐 지난 1953년 4월 3년제로 개교했다. 첫해 5개과 8학급으로 400명을 뽑았다. 전국에서 특차시험으로 선발했고 재학 중 국비장학금이 지급됐다. 교과목은 공업수학, 재료공학, 전파공학 등 최고 수준의 교육이 이뤄졌다.

1957년 7월 체신고등학교는 초급대학인 체신대학과 3년제인 체신고등학교로 학제가 변경됐다. 체신대학은 통신행정과 통신업무과, 체신고는 통신과, 업무과, 기계과, 선로과, 전파과 5개 학과를 두었다.

체신고등학교는 1961년 10월 2일 정부가 `체신공무원 훈련소 직제`를 공포함에 따라 1964년 제9회 졸업생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배출한 졸업생은 모두 2196명이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체신고등학교에 입학할 뻔 했다. 이 대통령은 2005년 5월 편낸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체신고등학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어머니는 둘째 형(이상득 의원) 등록금 마련이 최대 과제여서 이웃을 만나면 한숨을 짓곤했다. 나는 말이라도 꺼내 보자는 생각으로 담임 선생님이 오라신다고 어머님께 전했다. 어머니는 국화빵을 굽다말고 먼 데로 눈을 돌렸다. `우리 형편에 너를 고등학교에 보낼수 없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형이 대학에 떨어진다면 몰라도…꼭 가고 싶으면 국비로 공부시키는 체신고등학교에 가볼수는 있겠지만…”

조영장 의원의 증언.

“저는 체신부에 대한 정책질의를 통해 정보통신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대학 설립을 줄곧 주장했습니다. 미래성장동력도 전문인력 없이는 불가능하잖아요. 당시만해도 정부안에서 체신부의 발언권이 약했거든요. 저는 13대에 이어 14대 때도 이런 주장을 계속 했습니다. 15대 때는 총선에서 낙선했어요. 그후 정보통신부가 IT분야 특성화대학으로 ICU를 설립해 무척 기뻤습니다.” 체신부는 정치권 발(發)로 시작된 인재양성 요구를 언덕으로 삼아 정보통신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체신부로서는 고소원(固所願)인 일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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