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을 찾아갈 때마다 제가 `을`이라는 것을 철저히 느낍니다. 기술보증기금의 보증 등이 없으면 대출 자체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기술력은 전혀 보지 않는 것 같아요"
디지털 셋톱박스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이모(41)씨의 하소연이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유럽, 중동 등으로 제품을 수출하지만 은행에서 대출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한다.
대형 조경업체에서 자금을 담당하는 정모(39)씨는 작년 하반기 들어 사업 환경이 나빠진 분위기를 확연히 느낀다.
"건설 경기가 안 좋다 보니 도매금으로 취급당하는 것 같습니다. 대형 건설업체에서 받아온 어음 할인을 꺼립니다. 어음 할인이 안 되면 단기자금 대출이라도 해 줘야 하는데 그것마저 거부합니다. 오랜 기간 주거래은행으로 지내왔는데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은행권이 중소기업 대출을 외면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사례들이다.
지난해 은행 대출 통계를 보면 왜 이런 하소연이 나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농협, 하나, 국민, 우리, 신한 등 5대 은행의 가계대출은 지난해 20조원 급증했다. 대기업 대출도 14조원 늘었다. 자영업자를 제외한 중소기업 대출은 오히려 3조원 줄었다.
중소기업의 대출 수요가 대기업의 3배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에 얼마나 소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경기가 좋을 때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렸다가 불황을 맞자 대출을 줄이 것이다. 맑은 날 우산을 빌려줬다가 비 올 때 거둬가는 은행의 악습이 재연된 셈이다.
이러한 대출 태도는 경제 여건 변화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말 현재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1.83%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 말(1.7%)보다 높아졌다. 건설, 조선, 해운 등에서 부실기업이 속출한 탓이다. 자산건전성을 고려해야 하는 은행으로서는 중소기업 대출을 꺼릴 수밖에 없다.
대기업의 자금 수요도 늘고 있다.
경기 둔화가 점차 뚜렷해지자 지난해 1~9월 상장기업의 현금흐름은 전년보다 악화돼 업체당 평균 -17억원을 기록했다. 현금흐름이 나빠지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기업의 자금 수요가 늘자 중소기업이 `찬밥` 신세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은행이 자신의 처지만을 고려해 중소기업 대출에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면 경제 전체에 심각한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
`대출 축소→중소기업 경영 악화→일자리 감소→내수 악화→은행 연체율 상승→연체율 관리 위한 대출 축소`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모든 경제 주체에 큰 타격을 주는 악순환이다.
중소기업과 은행이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다. 회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대기업과 달리 자금 조달의 80% 이상을 은행에 의존하는 중소기업으로서 은행 대출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지나친 담보나 눈앞의 실적만을 요구하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적극적으로 대출을 해 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소기업이 무너지면 은행의 자산건전성도 함께 무너진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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