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이다. ‘월드컵 4강’ 여운이 가시지 않던 때다.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에겐 힘든 시절이었다. 한나라당을 탈당해 만든 1인 미니정당으로 지지율 10%를 보였으나 현실 정치는 매서웠다.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에서 참패했다.
권토중래를 모색하던 그가 갑자기 소속 상임위를 바꿨다. 16대 국회 후반기 상임위로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를 선택했다. 이유가 궁금했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그는 “가고 싶었던 곳을 이제야 가게 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출신이라 과학과 전자산업에 늘 관심이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본지 2002년 8월 27일자 28면 참조>
2011년 11월,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과학기술을 소리 높여 외친다. 분배와 성장은 우리 사회의 화두다. 양립하기 힘든 둘을 조화시키자니 쉽지 않다. 박 전 대표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한다. 분배는 고용복지정책이다. 성장은? 그의 새 카드는 과학기술이다. 박 전 대표는 그제 정책 세미나를 열어 과학기술 중심 국가성장전략을 제시했다. 전담부처 신설과 이공계 공직 진출 확대의 뜻도 비쳤다. 측근 이정현 의원은 “고용복지를 통한 분배,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성장이 경제활동의 ‘투 트랙’”이며 “박 전 대표는 두 부문을 국정운용의 우선 순위로 본다”고 설명했다.
과학기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작용했지만 그 역시 정치인인지라 표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바로 현 정부에 등을 돌린 과학기술인 표다. 현 정부는 과학기술부를 교육부와 합쳐 사실상 해체했다.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공약도 난데없이 세종시 논란에 휩싸였다. 미래 먹을거리를 찾겠다며 만든 지식경제부 연구개발(R&D)전략기획단은 1년 만에 예산 대폭 삭감으로 백지화 위기다. 토목건설 이미지에 지지율 바닥인 현 정부와 선을 긋기에 과학기술만큼 좋은 것도 없다.
과학기술은 ‘박정희 향수’의 또 다른 축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65년 월남 파병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받은 무상 원조금 전액을 과학기술진흥에 썼다. ‘과학기술입국’이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옛 과학기술처가 그 상징이다. 구미전자산업단지와 1970년대 입안한 대덕연구단지도, 금오공고와 부산기계공고도 마찬가지다. 부산기계공고는 2008년 8월 박 전 대통령의 ‘과학입국 기술자립’ 휘호석을 세웠다. 제막식 참석은 박 전 대표의 대선 경선 이후 첫 공식 행사였다. 그가 새로 내건 ‘과학기술입국 2.0’의 정치적 함의는 이렇게 많다.
과학기술인은 박정희시대만큼은 아니라도 처우가 확 달라지리라 기대할 만하다. 더욱이 박근혜 대항마로 떠오른 이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하나도 아닌 두 유력 대선주자가 이공계 출신이다. 워낙 변수가 많은 대선이라고 하나 과학기술이 공약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인이 고무되기 충분한 상황이다.
관건은 시간과 콘텐츠다. 과학기술 중심 국정도 좋지만 이를 끈기 있게 추진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 정책 효과가 오랜 시일이 지나야 나오기 때문이다. 제한된 대통령 임기 내에 나오지 않는다. ‘원칙’과 ‘일관성’을 이미지로 삼은 박 전 대표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기술 융합과 국제 흐름도 잘 읽어야 한다. 산업화 시대와 정보화 시대의 과학기술정책은 달라야 한다. 5개년, 10개년 계획도 유연성 있게 조정하고 운영해야 하는 시대다. 박 전 대표 진영 과학기술인들이 새 흐름을 제대로 읽는지 살펴볼 일이다. 이러한 검증은 다른 대선주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말도 과학기술인에겐 전혀 들리지 않을런지 모르겠다.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남다른 애정 표시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상황이 아닌가.
신화수 논설실장 hs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