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는 컴퓨터가 사람을 이겼다. 비슷한 게임이지만 바둑에선 양상이 다르다. 엄청나게 빠른 계산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아직 인간의 두뇌를 이기지 못한다. 체스와 달리 바둑은 매번 두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 컴퓨터가 사람을 이기기 어려운 결정적 이유는 또 있다. 컴퓨터는 바둑에서 말하는 ‘세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리를 내어주는 듯 하지만 알게 모르게 쌓인 세력은 결국 바둑을 승리로 이끈다. 계산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다.
세(勢)는 힘이나 기운을 얘기한다. 흔히 세력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일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터에서 승기를 잡고 못 잡는 것은 세에 달렸다. 온라인 세상에서 세의 역할은 더욱 강력하다.
내달 과기 단체들이 한데 모여 정치권에 과기현안과 요구사항을 얘기하는 행사를 갖는다. 그 동안 개최된 행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한 원로 과학자는 이를 두고 ‘과기인이 세(勢)를 모을 때’라고 설명했다. 과학자는 정치·실리와 무관하게 묵묵히 자신의 연구를 해 왔다. 이들이 세력을 얘기하고 나선 대목이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차기 정부에서 뭔가를 얻으려는 행보는 아니다. 그보다 세를 모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과기계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현 정부 들어서 과학기술계는 적지 않은 소외감을 경험했다. 당장 과기부가 사라졌다. 그 나마 통합된 교과부에서도 지금은 과학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과학기술 정책은 교육 이슈에 밀려 찬밥 신세이고, 조직은 고사(枯死) 위기에 놓였다. 과기부 출신 공무원들은 수개월마다 짐을 싸 이 부서 저 부서로 옮겨 다니는 ‘떠돌이’ 신세가 됐다.
중요한 과학 현안이 터져도 과기계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역 기반 정치인 목소리가 컸다. 국회에서 과학관련 법안은 뒤로 밀리기 일쑤다. 국회의원들은 틈만나면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의 토대’라고 입을 모은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기인들이 세를 모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윤대원기자 yun197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