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이 다시 등장했다. 이 회장이 위기론을 설파할 때마다 삼성그룹은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이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의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는 신경영을 선언하며 위기론을 언급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재빨리 체질 개선을 단행, 세계적인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게 된다. 1995년 삼성전자는 국내 기업 최초로 1조원의 영업이익을 돌파하고 세계에 삼성을 알리게 된다.
지난 2007년 중국이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는 틈바구니에 낀 ‘샌드위치 위기론’을 설파한 이후 지난해 경영복귀와 함께 연달아 위기론을 내놨다.
지난해 3월 경영복귀 당시 이 회장은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진다. 삼성도 어찌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며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삼성전자는 신수종 산업을 발표하는 등 새로운 성장동력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이 없었으면 어쩌면 삼성에서 지켜만 봤을 수도 있던 품목들이었다.
이 회장은 지난 6월에 삼성테크윈 감사 결과를 보고받고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됐다”며 “삼성그룹 전체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발언으로 그동안 잘못된 관행에 무뎌졌던 삼성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22일 삼성전자 세계 최대의 메모리 공장 가동식과 세계 최초 20나노 D램 양산장소는 이건희 회장의 위기론이 아니었으면 그냥 내부 잔치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업계발 태풍’에 반도체 임직원들은 다시 긴장하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해 말부터 불어온 메모리반도체 시장 불황을 ‘거센 파도’로 표현했다. 이를 잘 헤쳐 나가 세계 최고를 일궈낸 성과는 치하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우려는 앞으로 몰아닥칠 위기와 위협이 ‘태풍’ 수준이라는 데 있다. 새롭게 꺼낸 위기론 카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십여년간 선두 자리를 유지한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있지만 새롭게 도전하는 비메모리 시장에서의 위협은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큰 위협은 글로벌 공룡 기업들의 견제다. 최근 주요 고객사인 애플이 특허소송으로 삼성전자에 직격탄을 날린 데 이어 메모리와 모바일AP 구매처도 변경하는 등 이미 태풍급 견제는 시작됐다. 앞으로 진출할 CPU 시장에서 반도체업계의 절대 강자인 인텔과의 정면승부가 예고되고 있다. 메모리 시장에서의 경쟁과는 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 회장이 위기론을 내놓을 때마다 삼성전자는 빠른 대응과 전략 마련으로 위기를 넘겨왔다. 이건희식 ‘위기 경영’이라는 표현도 이 때문에 등장했었다. 비관론에서 출발한 이전 위기론과 달리 이번 위기론은 긍정론에서 시작됐다는 차이가 있다. 새로운 이건희식 위기 경영이 시작됐다.
서동규기자 dk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