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표 KAIST 총장은 우리나라 대학 개혁의 ‘상징코드’다. 요즘 내·외부에서 일시적인 난관에 부딪히며 주춤거리기는 해도 지난 5년간 드라이브해온 개혁의 큰 방향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 총장의 개혁 패러다임은 테뉴어 제도 도입과 기초 및 원천 R&D로의 전환, 강력한 학과장 시스템 도입, 대대적인 교수충원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미국 MIT나 하버드대처럼 대학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스스로 ‘기부 바이러스’임을 자처했다. 서 총장이 지난 5년간 기부받은 대학발전기금만 1700억원이 넘는다. 현재도 70억원대 자산가가 기부를 협의 중이다.

 서 총장은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저만치 앞을 내다보며 바위가 나타나면 바위를 치우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나아가길 좋아하는 타입이다. 서 총장에게 지난 5년은 ‘전후좌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시간이었다.

 경영 2기, 새로운 도전과 변화의 전환점에 서 있는 서 총장의 캐치프레이즈는 ‘스스로 생각하는 인재’다. 교육시스템은 에듀케이션 3.0과 I-4 교육프로그램이 핵심이다.

 서 총장으로부터 KAIST의 비전과 경영기조, 재도약을 위한 필요조건 등을 들어봤다.

 

 -KAIST가 추진 중인 I-4 프로그램과 에듀케이션 3.0에 대해 설명해 달라.

 ▲KAIST의 교육을 세계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I-4는 국제화, IT기반, 자율화, 통합을 기반으로 하는 프로그램이다. 전담과목 교수의 지도 아래 미리 준비된 교재와 인터넷으로 자율 학습하는 능동적 수업과 통합 및 창의적인 안목 강화, 인터넷을 통한 글로벌 수준의 학습 등이 핵심이다.

 에듀케이션 3.0(교육혁신)에서는 학습자 중심의 디지털 교육 시스템을 구축한다. 또 상호 협력하는 그룹학습시스템을 도입한다. 그리고 최근 붐을 일으키는 스마트폰 및 아이패드 등을 활용한 모바일 학습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다. 앞으로 교수진과 학부교육 강화방안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눌 계획이다.

 -대학 개혁과 총장의 역할에 대한 견해는.

 ▲총장은 큰 틀에서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 된다. 철학적으로 교육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내놓으면, 그에 대해 서로가 논의하고 토론해 보다 심도 있는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

 학과장이 밑바닥 정서를 반영해 의견을 정리해 가져오면, 그것을 갖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이다.

 우리나라에 유명 수학자가 안 나오는 것은 주입식 교육 때문이라고 본다. 생각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총장도 틀릴 수 있다. 그러면 누군가 질문을 해야 하고 토의를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다.

 한국 대학은 변화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효과적으로 투자하고, 그 결과물을 얼마나 제대로 도출해내느냐 하는 고민을 보다 진지하게 해야 한다. 일을 처리하는 데 절차상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절차가 본질과 목적을 제한해선 안 될 것이다.

 내가 낸 안이 최고는 아니기에 반대도 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기부가 서툰 한국 풍토에서 대학발전기금 모금과 기부문화 확산에 크게 기여하셨는데.

 ▲돌아보니 5년간 1700억원을 모았다. 박병준 재미 사업가 기부금으로 KI빌딩을 건립했다. 닐 파팔라도 미국 메디텍 회장은 캠퍼스 내에 의료복지 시설인 ‘카이스트 클리닉’을 건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엔 김병호 전 서전농원 대표에 이어 그의 부인인 김삼열 여사가 추가 발전기금을 냈다.

 기부가 확산하기 위해서는 기부자 의도에 맞게 돈을 잘 쓰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KAIST는 기부자의 여망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여성 총장은 10년간 8000억원의 기부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KAIST에 기부한 인물들의 특징을 보면 대부분 자수성가한 분들이다. 재력가들이 많이 나서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한다.

 -KAIST가 우리나라 대학 사상 처음으로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했다. 요즘 분위기 어떻게 보고 있나.

 ▲좋은 학생을 찾자는 것이 입학사정관제 도입의 기본 취지였다. 그동안 과학고 학생을 주로 뽑다 보니, 전국 1300여 고교 가운데 1200곳에서는 KAIST에 학생을 입학시키지 못했다. 또 지역에 위치한 고등학교의 우수 학생 선발이 어려웠다. 그런 문제를 입학사정관제가 많이 보완했다고 본다.

 다만, 학교당 1명 안팎 학생을 선발하다 보니, 입학생들이 친구가 없고 서로 생각을 공감할 대상을 찾지 못하는 단점이 드러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5명씩 팀을 짜 과제도 함께 풀고, 공부도 함께 하도록 하는 그룹공부시스템을 도입하려 한다. ‘에듀케이션 3.0’에 포함돼 있다.

 -최근 구글의 모토로라 M&A 등으로 SW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ICT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부상, 노키아의 쇠락 등을 SW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꼭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SW를 해야 하고, KAIST도 SW 교육 강화를 위해 학생도 더 선발하려 한다. 이것이 필수조건이라는 전제 위에서 얘기를 풀어보면 SW는 일종의 공학의 틀이다. 애플은 이 틀을 잘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시스템디자인 구상이 떨어진다고 본다. KAIST의 온라인 전기차가 바로 시스템 구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시스템을 잘 구상해야 물건을 잘 만들 수 있다. 구상만 잘하면 인도에서 인력을 가져다 SW를 설계하면 된다.

 시스템디자인은 국내 대학에서는 안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이 준비가 안 돼 있다. 얼마 전 단전사태로 전국이 난리가 났다. 이러한 문제가 안 생기게 하려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나라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분석은 잘하지만, 시스템에는 취약하다.

 KAIST에는 시스템디자인을 위한 프레시맨 디자인 코스(르네상스 프로그램)가 대표적이다.

 -KAIST가 중점 투자하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여러 분야가 다 중요하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라이프 사이언스(생명과학)를 들고 싶다. 선진국들도 생명과학 분야에 정부예산의 20% 이상을 투입하고 있다. 그만큼 생명과학이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KAIST도 연구병원이 조속히 건립돼야 한다고 본다. 예산도 지금보다 두세 배는 더 있어야 한다. 마우스로만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임상도 해봐야 할 것이다. 현재는 실험할 데가 없다.

 연구도 이제는 융합이다. 생명과학에 뇌과학도 접목해야 한다. 이제는 과학기술도 종합대학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5년 전 KAIST에 와서 대학 연구는 기초 및 원천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양극단(컵)이론을 주창했는데 소신엔 변함없나.

 ▲기초·원천의 대표적인 연구가 온라인 전기차(OLEV)와 모바일 하버다. 모두 2009년 시작했는데, 2년 만에 상용화에 들어갔다. 얼마나 논란이 많았나. 그러나 현재 과천 서울대공원에서는 온라인 전기차가 운영되고 있다. 이 상용화를 위해 몇몇 민간 투자자를 중심으로 회사 설립을 추진 중이다.

 모바일 하버도 예산부족으로 3분의 1로 축소해 시연했지만 성공적이었다. 미 해군이 10조원을 들여 연구했지만 제대로 못한 과제다. 이제는 그들이 기술을 사겠다고 관심을 보이고 있다.

 펨토초레이저는 기초연구를 통해 위성 거리측정까지 나간 경우다. LNG선의 단열재도 만들어 삼성이 대당 1000만달러의 로열티를 대체할 수 있게 했다.

 대학 연구진은 논문 등에 집착해선 안 된다. 모두가 진급 때문에 논문에 집착하는 것 아닌가.

 KAIST에도 젊은 교수가 근래 들어 200여명 충원돼 430명에서 600명으로 늘었는데, 그들에게도 논문 쓰는 데만 중점을 둬선 안 된다고 얘기했다.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면 될 것이다.

 -KAIST가 재도약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두 가지다. 교수와 예산이 절대적으로 더 필요하다. 학부생 4000명, 대학원생 6000명이 있다. 생물학과를 미국 MIT와 비교하면, 교수 수가 30명으로 3분의 1 수준이다. 뇌 분야나 생물 분야 인력이 많이 모자란다. 수학이나 물리 분야도 모두 모자란다. 300~400명의 교수가 더 충원돼야 한다. 과학기술 대학은 교수 월급보다 교수에 딸린 시설이나 학생이 더 중요하다. 그걸 다 따지면 교수 1인당 10억원가량의 예산이 필요하다.

 최근 교수협의회 측과 KAIST 문제에 대한 수습안을 놓고 약간의 이견이 있다. KAIST를 아끼는 마음은 서로 같다고 본다. 다만, 교수협의회와 학교 간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교수협의회장은 회장대로, 교수는 교수 직분대로 누구나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영역과 절차라는 것이 있다. 그런 점을 서로가 잘 보듬어 방법을 찾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단 모든 것을 열어놓고 논의해 나갈 것이다. 소통을 위해 서로가 유연해야 한다.

 

 ◇서남표 총장은

 국내 대학개혁을 선도해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서 총장은 1959년 MIT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카네기멜론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MIT 기계공학과 부교수로 부임해 MIT 생산기술연구소장, 기계공학과 학과장, 석좌교수를 거쳤다. 학자로서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와 뛰어난 행정적 리더 역량을 보여줬다.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 과학재단(NSF)의 공학담당부총재(대통령 추천 및 상원 인준으로 임명)를 역임하면서 미국 정부의 공학담당 연구개발 총책임을 맡아 그 당시 일본에 뒤지던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1년 6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MIT 기계공학과 학과장을 10년 이상 역임하면서 교수진 40%가량을 새로 임명하고 교과과정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등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 시기에 MIT 기계공학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았다.

 학문적으로는 공리적 설계이론(소비자로부터 받은 요구를 분석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한 일련의 과정을 연구하는 분야)의 창시자로 마찰공학, 제조과학기술, 설계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뛰어난 연구업적을 일궈냈다.

 현재 미국 인명사전과 세계 5000명의 지도급 명단에 등재돼 있다. 지금까지 3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50여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그밖에 다수의 글로벌 기업과 미국 정부기관, UN, 세계은행 등의 기술자문을 수행했다. 스웨덴 왕립 공학 아카데미(IVA) 해외회원, 미국기계학회 생산성 위원장, 미국 기계공학회 평생회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평생회원 등을 맡았다.

 주요 상훈으로는 미국 기계공학학회(ASME) 블랙올상 공동수상(1982), NSF 올해의 국가공학자상(1987), NSF 우수 업적상(1988) 등 20여개의 상을 받았다. 2009년에는 기계공학계의 최고 영예인 미국 기계공학학회의 ASME 메달을 수상했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