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훨씬 신뢰가 중요하다. 신뢰가 무너지면 금융은 존립 가치를 잃는다.
금융의 기초인 화폐가 인류 역사에서 ‘약속·믿음’의 출발점인 것만 봐도 이는 증명된다. 금융감독원은 기관 슬로건을 ‘금융은 믿음 가득, 국민은 행복 가득’으로 내걸고 있을 정도다.
올해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신뢰 위기’와 함께 출발했다. 연초 터진 저축은행 사태에 이어 현대캐피탈 해킹, 농협 전산망 사고 등 정책·보안·운영 등 전 분야에서 신뢰 이슈가 터졌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신뢰 회복은 우리 금융산업과 시스템이 풀어야 할 최대 과제가 됐다.
우선 금융 분야 신뢰 회복 방향은 △예측가능한 정책 및 집행 △금융기관·금융회사의 개선 노력 △서민·중기 등 사회적 약자 서비스 확대 △글로벌 위기 대응력 제고 등으로 압축된다.
정부-관련 기관-금융회사-금융소비자로 이어지는 전 과정의 신뢰가 회복돼야만 금융시장 자체의 원활한 흐름은 물론이고 금융이 가진 여러 파생 기능(대출·신용·외환)도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
한국 금융시장 업그레이드를 위해 헤지펀드 도입, 투자은행(IB) 허용 등 다양한 변화가 모색되고 있지만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신뢰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투명하고 확실한 정책 필요=금융위원회는 올해 들어 저축은행 사태에 쫓겨 다니기 바빴다. 선진국형 금융시스템 도입 추진, 자본시장법 개정안 발표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펼치긴 했으나 중요성은 저축은행 사태에 묻혔다.
론스타와 외환은행 매각, 우리금융지주 민영화 등 핵심 사안에는 우왕좌왕했다.
가계대출 문제에 직면하면 은행 대출을 옥죄었다가 풀어주고 또 카드사 대출을 막는 등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였다. 자연히 시장엔 신뢰감을 줄 수 없었다.
한 금융권 전문가는 “금융시장 안정과 신뢰 회복을 위해선 정책이 90% 이상이란 말이 있다”며 “정책이 투명하고 일관성 있게 진행되고 그것이 예측 가능한 수순으로 풀려간다면 금융 불확실성은 적어도 국내에서 만큼은 확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회사의 개선 노력=대형 은행의 사회공헌 및 복지기금 출자가 잇따르고 있다. 금융회사는 근본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주머니로부터 수익을 얻기 때문에 반드시 사회에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것이 한때 분위기에 편승해 유행처럼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은행, 카드사, 신용기관 등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가지고 사회와 국민을 향해 팔을 벌려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한 금융상품, 위로금, 시설 방문 등 일회성이 아니라 금융이 책임지고 있는 사회안전망 시스템 전반을 업그레이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상대적 약자를 보호하고, 키워라”=미소금융 등 서민 금융시스템은 사회를 지키는 안전판과 같다. 차하위 계층으로 몰리는 것을 막고 국민 생활과 경제가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다.
위기에 빠진 중소기업이나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창업기업을 돕는 일도 금융 몫이 크다. 이들 기업은 사업 경쟁력이 없어서라기보다 당장의 기회자금이 없어 어려워한다. 이들에게 이 자금은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 창업기금이나 기술보증 등 지원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수요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
금융회사 전체에 개인, 기업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금융지원이 일상화돼야 한다.
한 벤처기업 임원은 “예전에 비해 금융기관과 은행 눈빛이 많이 따뜻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도 “아직도 기업을 하기에는 은행 대출 장벽이 너무 높고 두텁다. 은행 스스로 기업가 입장에 서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내부 안정 유지도 중요=지난 2008년 유례가 없다던 글로벌 경제위기는 잘 넘겼다. 물론 외부 위기를 차단할 내부 시스템을 잘 갖춰서가 아니라 수출이 잘 받춰줬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 신용 강등과 잇따른 유럽 국가 재정위기 신호로 우리 금융과 경제가 위협받고 있다. 이번에는 수출도 받쳐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럴 때 우리 내부 안전시스템과 대응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신뢰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가뜩이나 외부 영향을 크게 받는 우리나라 증시, 외환시장 시스템상 고도의 안전화 장치가 요구된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우리 내부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외부에서도 우리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