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MA 로열티 협상(4)
CDMA방식 1단계 공동기술 개발은 1992년 1월 31일로 끝났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는 5개월간 5명의 연구원을 퀄컴에 파견해 CDMA 개발 및 시험평가 업무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CDMA 시스템 기본구조 설계서와 디지털 접속 하드웨어 설계서, ASIC 기본설계서 등 기술문서 42종을 넘겨받았다. 2단계 공동개발은 9개월간 기술료 1000만달러를 퀄컴에 주고 CDMA 상위 설계와 이동시험장치인 RTS를 운영한다는 내용이었다.
1992년 1월 24일.
화이트 하비 퀄컴 수석부사장이 변호사인 스티브 알트먼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
2단계 공동개발 계약 논의와 한국기업들에 대한 로열티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ETRI는 CDMA 방식의 공동 기술개발에 지정 생산업체도 참여하자며 계약 변경을 퀄컴 측에 요구했다. 퀄컴은 CDMA 기술을 사용하는 한국업체에 로열티와 선급기술료를 요구했다.
ETRI에서는 이원웅 부소장 겸 정보통신개발단장(인천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역임)과 이영규 본부장(TTA 전문위원 역임), 이혁재 부장(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김광호 사업개발실장(현 ETRI책임연구원), 한국통신(현 KT) 고문인 장덕순 변호사(현 인터넷주소 분쟁조정위원)가 이들과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영규 본부장의 회고.
“당시 퀄컴의 경영이 어려웠습니다. 자사 기술을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업체들은 로열티를 내야 하며 그에 앞서 선급기술료를 달라고 했습니다. 로열티를 줄 때 미리 준 액수만큼 제외하고 잔액을 지급하면 되지만 기업들은 선급기술료를 적게 주려고 했어요.”
1월 24일과 25일 서울에서 열린 1차 협상에서 퀄컴은 선급기술료로 네트워크업체에 국내 판매용은 250만달러, 수출까지 할 경우 550만달러를 요구했다. 단말기 업체는 국내용은 150만달러, 수출까지 하면 300만달러를 내라고 했다.
퀄컴은 소프트웨어 소스코드도 별도 선급기술료를 달라고 말했다. 단말기 마이크로 프로세스 소스코드는 50만달러, 듀얼모드 디지털모드 LLD는 25만달러, 보코더 소스코드 50만달러, 셀 소스코드 65만달러, 보코더 실렉터 소스코드 20만달러 등이었다.
로열티와 선급기술료는 ETRI가 내는 것이 아니었다. 관련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돈이었다. ETRI는 체신부 지침과 기업들의 의견을 수렴해 협상에서 기업 측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협상팀은 회의가 끝나면 즉시 그 내용을 체신부에 보고하고 관련 기업들과도 정보를 공유하면서 대책을 세웠다.
2차 협상은 그해 3월 5일과 6일 서울에서 열렸다. 퀄컴 측에서 로저 무어 기술담당 부사장과 변호사인 스티브 알트먼이 나왔다. ETRI 측은 이원웅 부소장과 이영규 본부장, 이혁재 부장, 임명섭 박사(현 전북대 전자정보공학부 교수)가 협상을 했다.
3차 협상은 그해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간 서울에서 진행했다. 퀄컴에서 앨런 살머시 부사장이 대표로 왔다. 이원웅 부소장과 이영규 본부장, 이혁재 부장, 김광호 사업개발실장 등이 최종 협상을 벌였다.
협상에서 일방적인 만족이란 없었다. 밀고 당기면서 이익극대화를 위한 두뇌싸움이 치열했다.
잠시 퀄컴 측과 3차에 걸쳐 진행한 불꽃 튀는 협상과정을 되돌아 보자.
ETRI는 로열티를 5% 이하로 낮춘다는 방침을 정했다. 퀄컴 측은 AT&T와 모토로라 등과 앞서 체결한 사례를 제시하며 5% 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계약자의 로열티가 5%이므로 그 이하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체신부 입장은 강경했다. 로열티를 5% 이하로 내리라고 지시했다. 양측의 팽팽한 주장이 서로 맞섰다. 이 부소장이 ‘벼랑끝 전술’을 구사했다.
이원웅 부소장의 회고.
“퀄컴 측에 더 이상 협상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돈을 낼 기업들이 그렇게는 절대 못하겠다고 하니 나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고 했지요.”
당황한 살머시 부사장이 기밀사항인 AT&T와 맺은 로열티 계약서를 보여 주겠다고 나섰다. 협상팀은 퀄컴 측의 이런 제안을 한마디로 거부했다.
이영규 본부장의 말.
“그 계약서를 보는 순간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게 됩니다. 볼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협상이 제자리를 맴돌자 다급해진 살머시가 ‘ETRI가 해결책을 제시해 달라’고 말했다. 이 부소장은 제이콥스 사장과 담판을 벌였다.
이 부소장은 “로열티는 5%로 하자. 그 대신 공동개발이므로 양측이 로열티를 5 대 5로 분배하자”고 제안했다. 기발한 안이었다. 퀄컴 측은 “한국 측의 TDX-10기술을 다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ETRI 측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퀄컴 측은 로열티를 85 대 15 비율로 하자고 맞섰다. ETRI는 70 대 30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막판에 양측은 80 대 20으로 최종 타결했다.
퀄컴이 받는 5%의 로열티 가운데 20%를 다시 되돌려 받기로 한 것이다. 기업들에 가는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퀄컴 측이 받는 로열티는 4%였다. 벼랑끝 전술의 승리였다.
양측은 4월 29일 협약초안을 작성했다. 박헌서 박사(현 한국정보인증 회장)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ETRI는 협약서에 한국 업체 의견을 반영해 국내 시장의 독점실시권 기간을 7년으로 연장하고 퀄컴이 개발한 ASIC를 한국 업체가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그해 4월 30일 이원웅 부소장과 살머니 부사장이 최종 합의안에 가조인(假調印)했다.
그 무렵 ETRI 소장 인사가 단행됐다.
ETRI는 4월 28일 체신부에서 임시이사회를 열고 새 소장에 양승택 박사를 선임했다. 경상현 소장은 그해 7월 1일 한국전산원장(현 한국정보화진흥원)에 선임됐다.
양 소장은 1961년 서울공대, 미국 브루클린 공과대 대학원 전기공학 박사 출신으로 ETRI TDX사업단장을 거쳐 한국통신진흥 사장, 한국통신기술 사장으로 일했다. 그는 CDMA 상용화를 한 후 ICU 초대총장과 정통부 장관, 동명대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ETRI 초빙연구원과 KAIST 초빙 석좌교수, KMI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양 소장은 6월 말 직제를 개편해 후속 인사를 단행했다. 그해 7월 1일 이동통신개발본부를 이동통신기술연구단으로 확대하고 단장에 안병성 컴퓨터 연구단장(작고)을 임명했다. CDMA 개발업무를 맡고 있던 이원웅 부소장은 단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부소장으로 재직하다 1998년 인천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영규 본부장도 부장급으로 발령이 나 CDMA 시스템 개발업무만 맡게 됐다.
체신부는 그해 7월 24일 퀄컴과 ETRI의 2단계 공동개발을 승인했다.
양승택 소장은 그해 7월 30일 미국 퀄컴을 방문해 어윈 제이콥스 사장과 2단계 공동개발 계약서에 서명했다.
양 소장의 회고.
“그때 제이콥스 사장을 처음 만났다. 시험 중인 CDMA 기지국을 보여 주는 등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CDMA는 대학원 과정에서나 배우는 과목인데 우리 연구원 중에서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끝없는 일신 중에서).”
그러나 2단계 계약을 앞두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미 스탠퍼드대 루시넌 교수가 체신부에 보낸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퀄컴의 CDMA방식 이동통신기술은 문제가 많아 실패할 것이라고 적었다.
루시넌 교수는 위성통신분야를 연구한 학자였다. 그는 ETRI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가 1000만달러를 주고 2단계 공동개발 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그런 주장을 하자 체신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게 사실이라면 1000만달러를 날린 일이었다. 시급히 사실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퀄컴 측이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라”며 자료를 제시했다. 루시넌 교수가 다른 업체 지원을 받아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의혹이 규명되자 계약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체결됐다.
2단계 계약에 따라 그해 9월 ETRI는 공동연구를 위한 연구원을 퀄컴에 파견했다. 이영규 부장을 팀장으로 14명이 퀄컴으로 갔다. 2단계 파견 연구원은 임명섭, 정인명, 이상천, 나종래, 전용태, 김명진, 이동욱, 노경호, 이남준, 권동승, 강창순, 정종태, 정용주씨 등이었다. 이 가운데 임명섭, 이상천, 이남준 나종래, 이동욱, 전용태, 김명진씨 등은 1993년 10월 31일까지 퀄컴에서 공동개발 연구에 참여했다.
이 부장은 9월 5일부터 그해 12월 귀국 전까지 한국 측 연구개발 책임자로 일했다. 제이콥스 사장은 이 부장에게 집무실 옆방을 내주며 각별한 친밀감을 표시했다.
그는 ETRI와 퀄컴 간 교량 역할을 했다. 그날 진행한 업무는 ETRI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이 부장의 말.
“퀄컴 인근에 아파트를 얻어 생활했습니다. 5~10분 거리였어요. 기혼자는 가족을 데리고 왔어요. 아침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하고 오후에 세미나를 했어요.”
그해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월간조선 11월호에 ‘세계시장의 제패를 꿈꾸는 14명의 한국인’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부장의 큰형님이 당시 이남규 스포츠조선 편집위원(조선일보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역임)이었다. 위싱턴 특파원을 지낸 그는 미 샌디에이고 퀄컴을 방문해 현장을 취재해 18쪽에 걸쳐 생생한 르포기사를 월간조선에 실었다. 이 기사가 논란이 됐다.
이 부장의 회고.
“연구소는 다소 폐쇄적입니다. 형님이 공동기술개발과 관련해 퀄컴 현지의 공동기술 실태를 취재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기사가 나가자 많은 오해를 샀지요. 억울한 점이 많았지만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제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해 12월 31일 귀국한 그는 CDMA 업무에서 배제됐다. 그리고 이동통신연구단 기술역으로 근무하다 1994년 1월 ETRI를 떠났다. ETRI와 인연의 끈이 다했던 것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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