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 `화려한 귀환`

1986년 데뷔한 `각진 그랜저`는 당시 부(富)와 성공의 상징이었다.

미쓰비시 데보네어의 엔진을 들여와 이름만 그랜저로 붙여 팔다시피했어도 존재만으로도 포니가 득세하던 고급차 불모지에 파란을 일으켰다. 6년 뒤 2세대 그랜저, 또 6년 뒤 3세대 그랜저(XG)가 출시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랜저는 이후 에쿠스의 탄생으로 최고급차 지위를 내주게 됐다. 4세대 그랜저(TG)는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동생뻘인 K7에 준대형차 왕좌를 내주고, GM대우의 알페온에 부대끼면서 불명예 퇴진을 하기에 이르렀다. 5년 전만 해도 준대형차 시장의 80%를 점령했지만 지난해에는 점유율이 35%까지 뚝 떨어졌다. 지난 13일 현대차가 출시한 5세대 그랜저(HG)는 국산 경쟁차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수입차들 사이에서도 고급 세단으로서 상품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가장 힘든 싸움에 직면하고 있다.

벤츠 E클래스, BMW 5시리즈, 렉서스 ES350, 혼다 어코드 등 그랜저 차급은 지난해 판매가 50%나 늘어난 수입차 중 가장 많이 팔리는 모델이다. 가격대 역시 3000만~5000만원대 판매비율이 47.8%로 가장 많다보니 각 메이커들은 준대형급 모델의 가격을 낮춰가면서까지 사활을 걸고 있다.

"수입차를 압도하는 상품성과 고급감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이 신형 그랜저 곳곳에 묻어난다.

먼저 디자인. 전면부를 처음 대면하면 쏘나타 형님 같은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크롬 장식의 과감한 라디에이터 그릴과 치켜 뜬 헤드라이트, 라이트 상단부터 창문 아랫면을 따라 길게 흐르는 크롬 몰딩 처리 등에서 쏘나타 냄새가 물씬 난다. 현대차도 부정하지 않는다.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역동성을 강조한 `플루이딕 스컬프처` 패밀리룩이 쏘나타에서 시작해 그랜저에 이르러 완성됐다"고 밝히고 있다.

새가 날개를 쫙 편 형상의 크래시패드나 넥타이 같은 Y자형 센터페시아도 쏘나타 것과 닮았다. 문짝으로 연결되는 가니시 라인에 우드 장식을 덧대거나 가죽 시트에 섬세한 스티치를 넣어 고급차라는 점을 강조했다. 후면 디자인은 상당히 바뀌었다. 날개 모양의 LED 리어램프는 오히려 K5의 것에서 따온 듯 하다. 램프 공간을 육각형 모양으로 파고들어 현대차 패밀리룩 요소 중 하나인 `헥사고날` 이미지를 뒷면에도 심었다.

지붕에서 트렁크로 미끈하게 떨어지는 최신 유행 루프 라인을 적용해 뒷좌석 머리 공간을 희생하는 대신 정차 중에도 달리는 것 같은 역동적 디자인을 선택했다.

사실 성능이 5세대 그랜저를 말하는 핵심 요소다. 이미 현대차는 "성능 면에서는 기존 국산 준대형차가 경쟁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3.0 모델에는 새로 개발한 람다Ⅱ 3.0 GDI 엔진이 장착돼 제원표상 최고출력 270마력, 최대토크 31.6㎏ㆍm, ℓ당 11.6㎞ 연비를 달성했다. 2.4, 2.7, 3.3ℓ 엔진으로 출시됐던 구형 그랜저(TG)와 비교를 무색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같은 배기량의 BMW 5시리즈나 벤츠 E클래스보다 최고출력이 높고 연비도 소폭 앞선 것이다. 구형 그랜저 3.3의 최고출력은 259마력으로 신형 3.0보다 뒤처진다.

3390만~4190만원대인 일본 세단들이 제원과 가격 측면에서 그랜저에 주눅이 들 만하다.

혼다 어코드 3.5의 경우 배기량이 그랜저보다 높은 만큼 동력성능이 앞서 있지만 무릎 에어백이 없고 타이어공기압 경고장치 같은 옵션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현대차는 "그랜저의 상품성에 뒤진다"고 자신하고 있다.

그랜저 가격대가 종전보다 200만여 원 높아지면서 일본 수입차와는 성능뿐만 아니라 가격 측면에서도 수평 비교하게 됐다. 5000만~6000만원대 독일 프리미엄 세단과도 성능 면에서는 비교 가능한 수준까지 올랐다.

최고 파워가 뿜어져 나오는 엔진회전수(rpm)는 독일 세단들이 낮기 때문에 실제 도로에서 파워는 이들이 앞서는 느낌이다. 그러나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ASCC)이나 주차조향보조시스템(SPAS), 9개 에어백 기본장착 등 첨단 편의 및 안전장치는 프리미엄 수입차보다 낫다는 평가다. 앞차와의 거리 설정뿐만 아니라 앞차가 정지하거나 출발하는 움직임까지 감지해 자동 정지와 출발이 가능한 ASCC는 벤츠, BMW, 아우디만 갖고 있는 기술이다.

문제는 역시 가격이다. 160만원짜리 옵션인 ASCC 등을 모두 추가하면 그랜저 최고급 사양 가격은 4200만원에 육박한다. 수입차를 잡겠다면서 가격만 수입차와 비슷하게 올린 것 아니냐는 소비자의 불만을 잠재우려면 상품성 개선 폭이 가격 상승분을 압도한다는 평가가 나와야 한다. `그랜저=고급차`라는 25년 전 프리미엄 이미지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랜저가 상급 모델인 제네시스 시장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수입차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어떻게 내세울 것인지 경쟁회사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매일경제 김은정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