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렘린(러시아 정부) 경제 정책이 갈림길에 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브 대통령이 한목소리로 ‘규제 완화’를 공언했으되 2008년 금융위기 때로부터 기업과 은행 등을 연착륙시킨 관리 강화 체계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다. 푸틴과 메드베데브의 미묘한 경쟁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변수도 경제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을 전망이다.
29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은 푸틴 총리와 메드베데브 대통령이 더 많은 외국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메드베데브 대통령은 지난 28일 “불행하게도 러시아의 투자 환경이 나쁘다”며 “정부가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투자환경 개선 필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한 상태다.
이날 푸틴 총리는 “새해에 식품, 의료장비, 은행, 천연자원을 포함한 몇몇 분야의 외국인 투자 규제(제한)를 완화하겠다”고 밝혔다. 메드베데브의 발언이 있은 지 불과 한 시간여 뒤였다. 러시아 천연자원생태부는 곧바로 “전략적 원유 자원 개발을 위해 관련 기업 주식을 보유할 수 있는 외국인의 지분 한계를 10%에서 35%로 끌어올리겠다”고 제안했다.
푸틴과 메드베데브가 러시아의 기업 투자 환경이 나쁜 것을 인정하고 개선 의지까지 내보여 시선을 모았다. 두 지도자의 의지가 실질적인 규제 완화로 이어져 투자를 촉진할 수 있을지 주목됐다.
투자자와 사업가들은 지난 몇 년간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경제 규제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특히 지난주 러시아에서 크게 성공한 사업가로 손꼽히는 브라디미르 포타닌이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려면) 대기업이나 규제 당국과 같은 강력한 협력자가 필요”하고 “독립적인 사업을 위한 공간이 점점 더 줄어든다”며 정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포타닌은 향후 3년간 320억달러 상당 공기업의 민영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는 크렘린의 선택을 환영했으되 “더욱 야심 찬 계획”을 바랐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러시아를 직접 타격한 뒤 경제 통제를 강화한 크렘린의 정책이 국가를 지탱한 원동력일 수 있어 과도한 규제 완화가 되레 화를 부를 수 것으로 우려된다. 크렘린은 금융위기 동안 통제 강화 정책을 이용해 기업과 은행을 연착륙시켰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러 기업을 위해 보조금 수십억달러를 지원했다.
원자재 수출 의존도가 높고, 해외 신용도가 낮은 러시아 경제는 2009년 성장률이 7.9%나 뒷걸음질해 시름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파동 때와 같은 수준이다. 보유 외환이 풍족하지 않고, 앞으로 2~3년간 성장률도 4% 주변을 맴돌 전망이다. 이 같은 경제 환경이 푸틴과 메드베데브에게 ‘성장동력 마련의 정책적 부담’을 떠안긴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생필품 가격(물가)이 얼마간 낮게 유지되는 등 러시아가 외국인 투자 제한을 크게 완화해가며 경제 성장을 꾀할 만큼 절박한 상황인지는 여러 갈래 해석을 낳을 전망이다.
한편 푸틴 총리는 크렘린의 적극적인 기업 지원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곧 러시아산 휴대폰 기본제품을 1만999루블(약 370달러)까지 할인할 것으로 전해졌다. 세르게이 이바노프 부총리는 “(러시아산 휴대폰이) 애플 ‘아이폰4’의 모든 기능을 소화하고, 내비게이션은 오히려 더 낫다”고 자신했다. 그의 자신감은 러시아산 휴대폰이 미국 등의 광역측위시스템(GPS)과 러시아의 ‘글로나스’ 내비게이션 체계를 결합한 데서 왔다.
푸틴은 이 제품을 “러시아의 중요 법정 휴일인 국제 여성의 날(3월 8일)에 맞춰 출시해 모든 여성이 자기 남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하라”고 제안했다.
이은용기자 ey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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