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대항해시대]벤처 20년,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뿌리깊은 강소기업으로 회사를 키우고 싶습니다.”

수많은 중소기업 CEO가 입버릇처럼 외치고 있는 회사 성장모델이다. `작지만 강한기업`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기술로 세계를 석권한 기업` 우리가 흔히 히든챔피언이라고 말하는 목표를 향해 한국의 벤처는 꿈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대기업 중심의 초고속 성장으로 상대적으로 얇은 중견기업층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히든챔피언 다수 배출은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국내에서 중견기업에 해당하는 업체는 전체 기업 중 0.2% 정도로 독일 8.2%, 일본 1.1%에 비해 매우 빈약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현재 대다수의 중소기업은 오히려 히든챔피언의 필수코스라 할 수 있는 중견기업 진입을 꺼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견기업 진입과 동시에 기존에 받아왔던 각종 정부지원과는 작별을 고해야 하고 대기업과 경쟁을 펼쳐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지원 패러다임의 한계=그동안 국내 기업 지원 정책은 `중소기업 아니면 대기업`이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으로 진행됐고 이로 인해 중견기업은 정책대상에서 소외됐다. 국내 중견기업 수가 해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이런 제도적 취약점과 맞물린다.

중소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충분한 여력이 있음에도 종업원 300명 이상의 고용을 기피하고 분사하거나 자회사를 세우는 사례는 익히 들어온 바다. 종업원 300~1000명 사이의 제조업체 중 3년간 중소기업 유예기간에 속하는 56개사 중 33개사가 “다시 중소기업으로 복귀를 희망한다”는 웃지 못 할 설문도 나오고 있다.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순간 총 13종류나 되는 세금 혜택 등 각종 지원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중소기업이 어쩔 수 없이 택하는 한국 산업의 일그러진 자화상인 셈이다.

중소기업을 졸업하는 순간 당장 회사는 △중소기업 투자세액공제 △연구·인력개발비 세액공제 △생산성향상시설투자 세액공제 △임시투자세액공제 등 각종 조세혜택의 일시 상실을 걱정해야 한다. 여기에 은행의 중소기업 의무대출 범위에도 벗어나게 됨으로써 회사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래은행을 변경하고 자금조달에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이는 곧 연구개발 투자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산업기술재단에 따르면 51%의 중견기업이 최근 3년간 연구개발 투자를 현상 유지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 인력에 대한 정부보조금이 사라져 임금지불능력 취약에 따른 인력이탈 문제도 생겨난다. 특히 우수인력의 경우 회사의 노동비용 지급능력이 떨어지면서 대기업 스카우트에 바로 이직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근로자수 300~1000명 미만, 자본금 80억~300억원 미만의 중소기업을 졸업한 회사`인 중견기업은 국가산업의 `허리`를 담당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국가경제의 지속성장을 견인하는 원동력은 물론이고 대·중·소 상생협력의 견인차 역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견기업은 수준 높은 자체 R&D 역량과 전문 인력으로 대기업과 기술 분업을 강화하고 2차 협력 중소기업과의 생산·기술 협업 확산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는 게 세계적인 추세다.

청년 실업문제가 점차 심각해지는 지금 고용창출 부문에서도 중견기업의 육성은 필수다. 대기업은 점차 자동화 및 생산성 강화로 고용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에 양질의 인력이 취업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틈새 고용시장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글로벌 시장경쟁에서 전문·대형화한 부품소재 중견기업의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덴소와 보쉬 같은 원천기술 특허를 기반으로 시장지배력을 갖춘 기술패권주의 회사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듯 국내에서도 원천특허를 보유한 부품소재 중견기업을 다수 육성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새로운 대규모 기업집단이 나오지 않고 있다. 경제 성장과 활력 측면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지금과 같이 중견기업층이 얇은 모래시계형 산업구조가 지속될 경우 급부상 중인 중국과 전통적인 산업 강국 일본 사이에서 한국은 실물경제 전반에 걸쳐 경쟁력 약화를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래 지속 발전이 가능한 신성장동력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 해답은 고부가가치 부품과 소재, 장비를 공급할 수 있는 중견기업 육성에 있다.

◇가시밭길 중견벤처에 희망을=지난 3월 18일은 한국 산업의 커다란 변곡점을 가져온 날이다. 이날 지식경제부는 이명박 대통령 주재로 개최된 `제51차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범부처 차원의 `세계적 전문 중견기업 육성전략`을 보고했다. 정책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중견기업에 대한 국가지원의 첫 단추가 끼워진 셈이다. 이는 중견기업을 경제의 핵심주체로 인정하고 육성을 위한 체계적인 정책 방안을 범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마련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육성전략은 △중견기업 육성을 위한 법률적 근거 도입 △중소기업 졸업촉진과 졸업기업 부담완화 △중견기업 기술경쟁력 강화 △글로벌 마케팅 지원체계 구축 △`World-Class 300` 프로젝트 추진 5대 핵심전략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산업발전법`에 중견기업의 정의와 지원 근거를 명시하고 조세 및 금융부담 완화, 자금조달 프로그램을 도입할 방침이다. 또 연구개발 지원으로 중견기업의 기술역량을 강화하고 전문인력 지원과 함께 선진국형 기술확산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해외 수출 마케팅에서는 고급 현지 정보지원을 위한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을 가동해 시장 연착륙을 도울 계획이다.

정부는 `산업발전법 일부 개정안` 입법을 시작으로 해서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중견기업 육성 일정에 들어간다. 목표는 2020년까지 핵심기술 보유 회사의 발굴 및 육성을 통한 300개의 히든챔피언 육성이다. 히든챔피언 유망기업으로 선정된 300곳에 핵심 기술당 3~5년간 최대 100억원의 지원, 부설연구소의 세계적 수준 육성은 물론이고 해외시장 진출 때 연구개발, 전문인력, 자금, 해외마케팅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등 대폭적인 지원 정책을 준비 중이다.

정부는 단순히 종업원수, 자본금, 매출 등의 양적기준 뿐만 아니라 연구개발 투자, 수출 비중 등 질적인 기준까지 고려한 중견기업 지원을 진행한다. 글로벌시장 진출, 기술개발, 고용창출 등 기업가정신이 살아있는 중견기업 지원으로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고 정책의 정당성을 유지한다는 취지다.

해외에서는 이미 중견기업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중요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나름대로의 육성정책을 펴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2008년 경쟁거점 정책을 발표하면서 중견기업 범위를 신설하고 `2012년까지 500인 이상 중견기업 2000개 육성` `세계시장 리더가 될 혁신중소기업 육성`의 목표를 제시했다. 독일은 중견기업의 발전단계를 창업, 성장, 확장의 3단계로 구분해 맞춤형 지원정책을 펼치고 있다. 2000년 후반부터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은 전통적으로 국유기업을 우대하고 중소기업의 혁신역량 제고에는 무관심했던 문제를 인식하고 첨단기술을 보유한 중견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육성정책 개시로 빠르면 올해나 내년부터 각종 조세혜택, 금융, 연구개발, 인력 지원이 중견기업 대상으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벤처 20년, 그간 수많은 중소벤처의 고개를 떨구게 했던 문턱이 이제서야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될성 부른 떡잎 기업들을 위한 이번 정책은 히든챔피언이라는 목적지까지 탄탄하게 이어진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



<표 1> 회사 규모별 사업체 수 추이 (자료 : 통계청)

<표 세계적 전문 중견기업 육성전략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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