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곧 네트워크장비 산업 육성책을 내놓는다고 한다.
특정 산업 관련 정부 육성책이란 것이 사실 ‘구두선’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고, 알맹이는 빠지고 겉치레에 불과한 것도 많았다.
이번만은 좀 다른 모양이다. 지식경제부가 네트워크장비 산업의 중요성을 정확히 짚고, 거의 허물어지다시피한 국내 네트워크산업 생태계에 ‘핏기’라도 돌게 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꼭 필요할 때 정부가 나선 ‘시의성’도 돋보인다.
며칠 전 네트워크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온 업계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일례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 공공기관이 신규 네트워크 장비를 발주하는데, 기기 성능 및 기준(스펙)에 ‘에너지 와이즈’라는 단어를 명시했다. 언뜻 보기엔 저전력, 고효율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인 것 같지만, 이는 미국 시스코시스템스가 쓰는 ‘브랜드’다.
그러니 이 공공기관의 발주 공고를 다시 풀어쓰자면 ‘시스코의 저전력, 고효율 네트워크 성능을 충족시킬 것’이 되는 것이다. 국산 장비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정부 육성책은 얼마의 돈을, 어느 기간까지 투자하겠다는 내용보다는 이런 엉뚱하고, 빗나간 관행을 깨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업계의 피부에 와 닿는 진흥책이 될 수 있다.
우선 공공기관, 공기업 발주 네트워크장비 물량부터라도 제안요청서(RFP)를 내기 전에 이의 적정성을 평가할 전문가 그룹을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굳이 국내 장비업체들을 편들라는 것이 아니다. 아예 국내 업체를 배제하는 기준은 걸러져야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이 시행하고 있는 공공 네트워크장비 수요 정보를 6개월이든, 1년이든 미리 공개하는 것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발주기관 또는 기업의 내부 결정 기간은 엄청나게 긴 데 비해, 네트워크 발주는 길어야 2~3개월에 그친다. 마치 재고를 쌓아 놓고 발주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줄 아는 모양이다. 이런 발주 관행이 지속돼선, 국산 장비뿐 아니라 관련 소프트웨어(SW), 솔루션 등 연계산업 발전도 요원할 수 밖에 없다.
민간기업까지 전면 도입이 힘들다면 국가기관이라도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기간을 앞두고 네트워크장비 수요 예고제를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정부 네트워크 육성책에 이런 실질적인 내용들이 담긴다면 관련 업계는 더없이 반가워할 것이다. 그것이 정부의 제대로 된 역할이기도 하다.
요즘 글로벌 네트워크산업을 거론하면서 중국의 화웨이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고 한다.
화웨이의 급성장 뒤에는 중국 정부의 암묵적인 지원과 구매가 큰 역할을 했다. 세계무역기구(WTO)에도 큰소리치는 중국 정부를 마냥 쫓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WTO가 허용하는 공정한 경쟁제도는 갖추자는 것이다.
업계가 어려운 만큼, 이번 정부 육성책에 거는 기대가 크다. 업계에 주어진 몫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못했던 관행 타파와 제도 개선만 있어도 업계의 노력은 수십 배, 수백 배의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려는 정부와 민간의 노력이 함께 할 때 우리도 ‘한국판 화웨이’를 키울 수 있다.
산전부품 팀장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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