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봉덕 코맥스 회장(71)이 말하는 40년 전자기업의 생존 비법은 단순하다. 바로 ‘믿음’이다. 회사가 당장 쓰러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객과 협력업체 모두에게 신뢰를 주었기 때문에 코맥스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코맥스는 인터폰 업체로 잘 알려진 중앙전자공업의 전신이다. ‘전자’라는 말도 생소했던 1968년에 전화기 교환원을 호출하는 공전식 교환기를 개발하고 사업에 뛰어든 지 42년이 흘렀다. 기술 속도가 빠르고 부침이 심한 전자 바닥(?)에서 큰 기복 없이 반세기 좀 못 미치는 세월을 견뎌냈다. 그것도 국내와 해외에서 ‘인터폰’하면 코맥스를 제일 먼저 꼽을 정도로 시장을 평정했다.
“교환기로 사업을 시작할 당시 전화 자체가 귀한 시절이어서 꽤 돈이 됐습니다. 그러나 규제가 심해지고 통신시장에 갈수록 인맥과 연줄이 판치면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아는 분 소개로 인터폰이라는 제품에 관심을 두었는데 운 좋게도 아파트 건설 붐과 맞물려 초기 브랜드를 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변 회장의 신조가 된 품질경영, 신뢰경영도 이때 얻은 소중한 경험이 바탕이 됐다. 품질경영은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고객에 대한 무한한 믿음에서 출발했다. 인터폰 보급 초기에 불량품이 나올 법도 한데 제품에 문제가 있다면 직접 현장으로 향했다. 직원들도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낮에 영업을 하고 밤에 회장 자택에서 자기 일쑤였다. 이때 그가 깨달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 바로 신뢰였다. 한 번도 어기지 않은 납기일, 철저한 사후 서비스 덕분에 ‘인터폰=중앙’이라는 브랜드를 심어 주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푼의 이익을 위해 협력업체와 약속을 깨는 걸 가장 조심했습니다.”
변 회장은 지금도 품질에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이 있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신제품으로 바꿔 준다.
코맥스는 매출의 절반 정도를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197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인터폰 국제규격을 취득했다. 이때 수출에 나서 1994년 1000만달러, 2004년에 5000만달러를 해외 시장에서 기록했다. 수출 지역만 80여개국에 달한다. 이 가운데 37개 해외 파트너는 수출을 시작할 당시인 1970년대 중후반에 인연을 맺은 업체다.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파트너십 이상의 관계를 이어 왔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꼭 국경을 넘어 만난다. 변 회장 스스로 가장 큰 자산이 해외에 있는 파트너라고 이야기할 정도다.
“1970년대 중반 해외에서 거래업체를 잡는다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코리아라는 국가 브랜드가 지금 아프리카의 르완다 수준일 때입니다. 일일이 바이어를 찾아다니고 샘플과 팸플릿으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중국·대만 등 저가 제품이 범람하지만 해외에서의 변치 않는 코맥스 사랑은 이때 대부분 이뤄진 것입니다.”
코맥스는 지난해 ‘키코’ 사태로 어려움을 겪었다. 매출도 902억원으로 전년 953억원에 비해 다소 줄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경영 변수로 타격을 받았지만 빠른 시간에 안정을 찾은 데는 고객의 믿음과 40년 저력이 크게 기여했다. 키코에서 회복한 올해 변 회장은 다시 출발선에 섰다. 칠순을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 제품은 물론이고 개발, 마케팅 전략을 꼼꼼하게 챙긴다.
새로운 사업도 준비 중이다. 인터폰에서 홈네트워크 분야로 영역을 확장한 데 이어 올해 모바일 안드로이드 기반 ‘월패드’를 내놓고 스마트 홈 사업에 뛰어들었다. 프로젝터에 사용하는 레이저 광원 칩도 조만간 상용화한다. 변 회장은 “부침이 심한 전자업계에서 40년 넘게 코맥스가 브랜드를 유지한 비결은 결국 품질이었다”며 “작지만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