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어를 끌고 뛰어야 한다면 어떤 끈으로 묶고 뛰는 것이 가장 좋을까. 쇠사슬이 좋은가, 고무줄이 좋은가, 아니면 적절한 탄성계수를 갖는 가죽끈이 좋은가. 정답은 적절한 탄성계수의 가죽끈이다.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 것일까. 공산주의는 제로를 목표로 한다. 반면, 조정기능이 전혀 없는 극도의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격차에 제한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거래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빈부격차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빈부격차의 상한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성장을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신나게 늘어난 고무줄이 툭 끊어지듯 그런 사회는 곧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오늘의 과학기술은 첨단기술과 제품 개발로 시장을 만들고 석권하여 거기에서 번 돈을 다시 최첨단의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가속 일변도의 길을 달려가고 있다. 각 나라가 국제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지구의 종말을 알면서도 모두 파멸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공멸을 향해 달리는 치킨게임과 다를 바 없다. 과연 그 길 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다. 인류의 힘은 항상 창조보다는 파멸의 길에서 가깝게 성장해왔다.
능력이 좀 더 있거나 상황이 유리하여 일단 먼저 달리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여 끌려가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들이 적절한 빈부차이 범위 안에서 공존하며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계층간 알력이 증폭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화합의 사회를 만드는데 나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 중요한 단서이자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적정기술은 한국의 건강한 발전과 국제사회 기여의 수단이자 통로가 된다.
지구는 지금 환경오염과 기아 질병의 문제로 막판에 몰려 있지만 우리는 답을 못 내놓고 있다. 왜 많은 자선단체와 NGO 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상황은 계속 악화일로에 있는가. 일시적 전시적 구호작업은 결국 현지의 여건, 그곳의 사람과 산업에 연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우고 깨닫고 일어서도록 하지 않는 어떤 원조도 열매를 맺기 어렵다. 적정기술은 개도국의 민생, 산업과 경제가 결국 현지인의 힘으로 일으켜지도록 돕는 촉매이자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적정기술은 더 큰 생태계, 더 먼 미래가 우리의 근시안적, 이기적 행위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알고 인정하는 공학자들이 지구오염과 인류절망의 막판에 회개하며 내놓는 기술이다.
둘째, 적정기술은 무조건 첨단기술, 최고만 생각하다가 포퓰리즘에 빠지고, 자괴감으로 절망에 빠진 많은 한국의 젊은이에게 삶의 이유를 알게 하는 건강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이 점점 복잡해지는 국제사회의 관계에서 성공하려면 우리 젊은이들이 소통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지금처럼 큰 연구소, 대기업에서 첨단기술 개발과 조립공처럼 일부만 보고 배우며 자란 사람은 소통을 할 수 없다. 제 코 앞만 바라보고 뛰다가는 일순간 뽐도 내보긴 하지만 쉽게 절망하여 나락에 떨어지고 결국 아주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고 간다. 오늘도 자기 몫만 챙긴 어른들에 의해 교육수렁에 빠진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좁은 학교, 학원의 골방에서 썩어가고 있다. 적정기술은 이들이 더 큰 세계, 더 먼 미래를 보게 함으로써 이들을 신나게 살게 할 수 있는 산소다.
경종민 KAIST 전기및전자공학과 교수(kyung@ee.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