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아이패드 등 혁신적인 제품보다 애플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라고 혹자들은 평가한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CEO에서 퇴출되면서 엄청난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지만, 몇 년 뒤 보란듯이 재기에 성공한다. 스티브 잡스와 희대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이는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다. 최근 성공적인 자선 사업가로 변신한 빌 게이츠 역시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둘을 제외하고도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CEO들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많다.
대다수의 언론과 대중은 그들의 성공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스타들도 이전의 쓰라린 실패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성공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국내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코스닥과 벤처특별법 탄생으로 벤처기업 시대가 열렸다. 성공하는 벤처가 하나 둘 늘어나면서 이들 기업을 목표로 창업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공계 대학 선호도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러나 2001∼2005년 미국에서 터진 닷컴 버블은 고스란히 한국에 영향을 미쳤다. 실패한 기업인이 재기 불가능한 사회구조가 이때부터 강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벤처 기업가들이 실패로 인해 신용불량자, 심지어 노숙자로 전락했다. 이런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창업의 꿈을 접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우리나라와 미국 벤처 생태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실패’에 대한 사회적 태도다. 미국 벤처 기업가들은 실패를 재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은 데 비해 한국에서는 단 한 번의 실패가 ‘영구 퇴출’로 이어진다. 실패의 소중한 경험이 그대로 사장되고 노하우들이 묻히면서 한국 벤처 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벤처 붐이 일었던 1990년대 말과 현재를 비교하면 20·30대 젊은 벤처 사업가 비중이 50%대에서 10%대로 추락했다. 한국은행, 삼성경제연구소 등 여러 연구기관에서는 우리나라의 기업가정신 지수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성장 잠재력이 악화되고 있다는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 명예로운 퇴진을 막는 ‘연대보증제도’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CEO가 회사 운영이 힘들다고 판단하면 주주총회를 열어 동의를 구하고 사업을 정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기업을 그만두면 회사 빚이 고스란히 CEO 개인의 빚이 되는 이상한 관행이 판을 친다. 이게 바로 ‘대표이사 연대보증 제도’다.
대표이사가 회사에 연대보증을 섰기 때문에 기업이 망하면 모든 빚은 대표이사 개인에게 전가된다. 그래서 냉정하게 기업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무리하게 사업을 끌고 나가게 된다. 손해가 나도 선금만 받을 수 있다면 뛰어들어서 산업 전반의 공정가격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심지어 사업 실패가 예견되면 무리하게 자금을 끌어들이거나 분식회계, 회사 돈 빼돌리기 등을 시도하기도 한다.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가정만은 지키고 싶어서 범죄의 달콤한 유혹에 쉽게 빠지고 만다.
사실 연대보증제도는 고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벤처기업과 본질적으로 너무 맞지 않는다. 기업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금융권에 문을 두드리는데 연대보증이라는 족쇄가 채워지는 게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다행히 사업이 성공하면 문제가 없지만, 예상치 못한 시장 환경 변화 혹은 기술 개발 한계에 봉착하면 바로 채무자로 전락한다.
현재 기업 창업에 관한 연대보증은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이 요구하고 있다.
이민화 호민관은 “전체 보증잔액 대비 연대보증인에 대한 회수금액은 최근 5년간 평균 0.7%에 불과하다. 신보·기보의 연대보증 효율성은 떨어지지만 그로 인한 폐해는 엄청나다. 신용불량자 양산은 물론이고 제2 창업에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 정부 지원 정책, 실효성 있게 작용해야
최근 정부는 벤처기업 연대보증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대책을 내놨다. 기술보증기금이 보증한 벤처기업이 금융회사, 벤처캐피털 등에 투자를 유치한 경우 연대보증 부담을 줄여주기로 한 것. 현재 연대보증 대상자는 실제 경영자나 대표이사, 과점 주주이사 등이다. 기보 보증액 대비 기관투자 규모를 감안해 대상에서 일부 제외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기관투자가가 해당 기업 주식과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에 투자해 지분이 30∼50%면서 보증금 대비 투자금액이 두 배를 넘으면 실제 경영자만 연대보증 책임을 진다. 기관투자가 지분이 50%를 넘으면 연대보증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또 정부는 실패한 기업인이 고의성이 없었다면 심사를 거쳐 재기할 수 있는 재도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보완책보다 연대보증제의 원칙적인 폐지만이 창업을 활성화하고 기업가 정신을 극대화한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어설픈 지원 정책은 벤처 생태계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공공, 민간부문에 만연해 있는 ‘눈먼 돈’은 퇴출돼야 할 기업의 수명을 무리하게 연장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것. 처음에는 한 기업만 위기상황이고 다른 기업은 모두 건강해도 망해가는 기업이 계속 덤핑으로 공정가격을 무너뜨리면 결국 다른 기업들까지 망하고 만다는 설명이다.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좀비 경제(zombie economy)’라고 명명했다.
안 교수는 “처음에는 한 좀비(한계기업)만 있었는데, 이 좀비가 다른 건강한 사람을 물어서 좀비로 만들고, 결국에는 모두 좀비만 남게 된다”고 경고했다.
# 인수합병(M&A) 시장으로 퇴로 만들어야
대다수의 국내 기업가는 M&A에 정서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 많은 국내 알짜기업이 해외 자본에 헐값에 팔려갔던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M&A시장은 벤처 생태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장이다. 화려한 양지가 있으면 뒷처리를 할 음지도 있어야 한다. M&A는 한계에 도달한 경영자에게 적절한 퇴로를 열어줄 뿐 아니라 다른 사업에 재도전할 수 있는 기회도 안겨준다.
벤처기업이 코스닥 시장에 도달하는 시기는 평균 창업 후 12년 정도다. 이들은 상장을 통해 투자자본을 확충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창업 1∼2년된 초기 기업들은 벤처특별법이라는 정부 지원 아래 대출, 기술개발 자금지원 등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창업 5∼7년째에 접어들면 힘든 시절을 보내는 벤처기업이 많다. 정부 지원은 부족한데, 상장을 통한 투자금 확보는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이다. 창업 5∼7년째에 도달한 시기를 ‘죽음의 계곡’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기에 한계 기업이 M&A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국내에 전문 M&A거래소가 설립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이민화 호민관은 중간회수시장을 양성화하기 위해 M&A 거래소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해오고 있다.
◆실리콘밸리, 성공의 요람 아닌 실패의 요람
많은 이들이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성공의 요람’으로 추앙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같은 표현이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의 본질은 ‘성공의 요람’이 아닌 ‘실패의 요람’이다.
최근 미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에서 벤처 창업 후 중견기업으로 도약에 성공하기까지 벤처 기업인들은 평균 2.8회 창업한다. 즉 성공하기 전에 통상 두 번 이상 벤처에 실패한 경험이 있다. 실리콘밸리 벤처기업들 중에 창업 2년 뒤까지 성장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는 벤처의 비율은 5% 미만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벤처 인프라가 잘 발달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조차 대부분의 벤처는 실패하고 있다. 100개의 기업 중 한 개만 성공하고 나머지 99개 기업은 망한다는 국내 기업인들의 속설이 실리콘밸리에서도 들어맞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여전히 창업이 제일 활성화된 나라로 꼽힌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창업할 사람이 투자받을 곳이 많다는 것이다. 투자시장이 활성화돼 있기 때문에 실패해도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일은 드물다. 한번 실패한 사람에게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일 뿐더러 오히려 가점이 주어지는 경우도 많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기업가에게는 관대하다. 오히려 실패한 경영자에 대한 혜택이 큰 경우도 있다.
실패를 경험한 기업가에게 투자의 우선 순위를 부과하는 것이다. 기회를 잡은 기업가는 예전의 실수를 경험삼아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 같은 벤처 문화는 처음 창업하는 기업가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들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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