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사람이 바보입니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처럼 무겁고, 힘겨운 물음이 있을까.
과거를 현재가 평가하듯 미래는 현재를 엄정하고, 날카롭게 평가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김용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54)은 이런 물음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늘 긴장하고,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각성제 같은 효과가 머리에 퍼진다. 김 원장은 지난해 정부 연구개발(R&D) 기획 및 진흥 총괄기관으로 통합 출범하면서 ‘생각’이란 단어를 늘 앞세웠다.
산업과 시장을 ‘생각’하는 R&D, ‘생각’을 갖고 만든 진흥책, ‘생각’을 갖고 뛰는 직원 등 ‘생각’이 그의 모토가 돼버렸다.
생각을 갖고 지금 변화하고 만들지 않으면 미래 후배나 후대가 현재의 우리를 질타할 것이 뻔하게 되는 것을 김 원장은 가장 두려워한다. 국책 R&D도 시장과 수요에 맞게 변하지 않으면 지금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미래 후배들이 다 뜯어고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결국 ‘미래 사람이 바보입니까’라는 말은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라 ‘미래 사람은 절대 우리보다 못한 바보가 아니다’의 강조인 셈이다.
김 원장은 새해 업무에 들어가기 전날인 지난 3일 조용히 출근해 자리에 앉았다.
원래 공무원 시절부터 생각이 많기로 유명했던 그는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고 다음날 직원들에게 보낼 신년사를 써내려갔다.
‘플러스(+) 정신을 가진 생각들이 세상을 바꾼다(Ideas Changing the World with ‘Plus(+) Spirit’)’는 주제 아래 8쪽짜리 신년사에서 김 원장은 생각의 변화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플러스 정신’은 더해짐, 나아가 융·복합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의식의 동체라고 정의했다.
국가 산업기술, 원천기술 개발을 총괄 지휘하는 김 원장은 오히려 기술을 위한 기술 개발, 기능을 위한 기능의 발전 등은 후순위로 친다. 기능·기술적으로 진정한 세계 최고에 오르기 위해서는, 그 기술과 기능만 갖고는 안 되며 거기에 생각과 철학, 스토리, 인터페이스가 담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만의 기술보다는 기술과 문화·역사·문학·음악·영화 등이 신명나게 섞인 것을 만들어내는 일을 가장 중시한다.
1+1이 2가 되도록 하는 것은 개도국도 다하는 일이 돼버렸고, 우리는 지금까지 3, 4를 만들어 고속 성장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5, 10을 넘어 100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 수준에 생각과 스토리가 덧입혀져야 한다. 생각이 푸른 바다처럼 넘실대는 그런 대변화를 김 원장은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 화두로 ‘플러스 정신’을 꺼내셨는데, 어떤 뜻이 담겨 있습니까.
▲요즘 화두는 개방과 융합, 그리고 창조 세 가지입니다. 이에 잘 대응하기 위해선 기술에 인간·사회·철학과 심리가 더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더 잘 살 수 있게 발전해 왔는데, 이는 인류가 새로운 생각을 끊임없이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발명·발견·혁신·개혁·창조 이런 단어들이 변화하자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디슨의 전기, 뉴턴의 만유인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이 모두 새로운 생각에서 나왔고, 기술은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것에 의해서 발전해 왔으며, 신년 축하도 기술 발전에 의해서 변화해 왔습니다. 과학과 기술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을 이용한 서비스, 제품도 새로운 생각을 해야 발전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 연구개발(R&D) 변화를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방향은 어떻게 잡고 계십니까.
▲국가 R&D도 창조형, 창의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주어진 과제에 매몰되기보다는 창의 활동에 많은 지원이 돌아가는 체계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는 연구실에서 실험 많이 하는 것을 중시하고 거기에 드는 기자재비, 시약비 등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 왔습니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앞으로는 소프트웨어(SW)적이고 창의적 활동까지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연극활동하면서, 창작활동하면서 번뜩이는 R&D 아이디어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연구자가 생각하고, 창작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제활동에 담을 수 있도록 정부 지원도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올해 중심으로 잡고 있는 사업 목표는 무엇입니까.
▲지난해 통합기관 출범 뒤 시도했던 일들을 내실화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다양한 업무를 연결해서 시너지가 날 수 있도록 조직하고, 업무 문화를 짜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제 공동연구에 대한 내실 있는 추진과 함께 융합포럼, 지역연구사업 등을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추진하는 것도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산학연 기술 주체들 간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거기서 곧 창의성과 새로운 생각이 모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올해 처음 시행되는 녹색인증제도 잘 시행돼 사회와 산업에 안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기술의 성과, 즉 결과물의 사업화가 굉장히 요구받고 있는데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기술을 사업화할 때 시장 중심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연구실이 아닌 시장에서 중계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정보제공과 교류의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술거래의 제도적 연계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R&D 사업 공고제를 추천제로 일부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합니다. 서로 R&D 과제를 추천하고, 그 결과물을 시장 요구에 맞게 거래, 연계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사업끼리도 연계가 강화될 것이고, 시장 중심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국가 R&D의 융합형 전환뿐만 아니라, SW적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소득 3만, 4만달러 사회에 걸맞은 고품격화 등 거시적인 논제들을 자주 제시하시는데, 어떤 연유입니까.
▲사실 정부가 국민세금으로 R&D를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모두 좀 더 잘살고, 아름답게 살기 위한 것 아닙니까. 미국은 철저히 개인주의가 지배합니다.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다른 사람도 존중할 줄 압니다. 유럽은 고유 문화가 있으면서 나눠주고 도와가면서 사는 사실상의 사회주의로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남과 비교하는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모든 레퍼런스가 타인과의 비교에서 정립되는 사회입니다. 서로 생각의 벽을 터서 남의 생각과 자기 생각을 합쳐보는, 그래서 더 큰 융합의 생각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가야 사회의 격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생각 중심의 사회 구조로 가지 않으면 국민소득 3만, 4만달러의 패러다임은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고 봅니다.
이진호기자 jholee@etnews.co.kr
사진=정동수기자 dsch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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