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영 공학박사, 동양공업전문대학 경영학부 전임강사
알 파치노 주연의 ‘시몬(Simone, 2002)’이라는 영화가 있다. ‘시몬’을 감독한 뉴질랜드 출신의 앤드루 니콜은 전작 ‘트루먼 쇼’에서도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물과 세계에 대한 고찰을 실감나게 잘 다루었던 감독이다. ‘시몬’에서 영화 감독으로 등장하는 알 파치노는 콧대 높은 여배우의 비위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그녀가 촬영장을 떠나자 더 이상 영화를 제작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이때 죽은 친구가 남긴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과 장비를 물려받고, 이를 이용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한다. 제인 폰다의 목소리, 소피아 로렌의 몸매,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함, 오드리 햅번과 천사의 모습을 합성한 가상의 여배우 시몬은 최고의 영화 감독이 자신의 예술 세계에 걸맞은 연기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하자, 외모와 연기력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성공을 거둔다. 가상 인물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인기에 절망한 주인공은 ‘시몬’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가짜라고 주장하게 되지만, 세상과 팬들은 ‘시몬’이 가상 인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시몬’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주인공을 정신 병원에 가두고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한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실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오래전부터 SF 문학이 탐구해 왔던 고전적인 주제다. 보르헤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1940년 발표한 중편소설 ‘모렐의 발명’은 이러한 계통의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형 선고를 받고 도주한 주인공이 바다로 탈출,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빌링스’라는 섬에 도착한다. 그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어느새 많은 사람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성 포스틴과 그녀의 남자친구 모렐이 있는데, 외로움을 겪고 있던 주인공은 어느새 포스틴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섬의 주민들이 주인공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고, 동일한 행동과 말을 반복하다가 사라지곤 한다. 초자연적인 환상으로 생각됐던 모든 사건은, 모렐이 발명한 녹화 테이프를 통해 재생된 가상의 이미지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진상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 속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고, 그녀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기 자신도 가상의 영상 속에 삽입되기를 희망한다.
사이버펑크의 창시자 윌리엄 깁슨은 1997년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아이도루’에서 가상의 존재가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실제 록밴드의 스타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아이돌 스타 연예인과 결혼을 선언한다. 컴퓨터 그래픽과 인공지능 알고리듬으로 돼 있는 가상의 아이돌 가수가 차츰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고,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돼 실제 사람과 결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만남이나 육체적인 사랑은 불가능하지만, 가상 현실 속의 만들어진 인물이 지능을 갖추고 감정마저 갖게 되면서 실제 사람과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게 된 것이다.
‘시몬’이나 ‘아이도루’ 속에서 정말로 중요시되는 것은 컴퓨터 그래픽의 진보나 영화나 연예 사업에서의 가능성 등이 아니다. 이들 작품들이 내포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 인물이 진짜 사람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고, 이는 대략 70년 전 ‘모렐의 발명’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