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문술 빌딩에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신기술이 나오기 전에는 이곳을 찾아오지 않겠다.”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현 KAIST 이사장)이 지난 2001년 7월 KAIST에 300억원을 기부한뒤 한결같이 지켜온 신념이다. 정 이사장은 당시 홍창선 총장에게 “이 돈으로 모방연구를 하지 말아달라”며 이같이 언급했다.
그러던 그가 19일 기부금으로 지어진 KAIST ‘정문술 빌딩’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KAIST가 바이오·뇌공학과 설립 7년 만에 이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KAIST는 그동안 정문술 이사장의 기부에 보답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독창적인 원천기술 개발에 매진해오다 이번에 ‘대박’을 터뜨렸다.
이날 정 이사장은 서남표 KAIST 총장을 비롯한 100여명의 바이오 관련학과 교수 및 학생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으며, ‘정문술 빌딩’ 현관문에 발을 디뎠다.
방명록에는 ‘감동했습니다, 잘사는 나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이곳에서 열어주실 것을 간절히 기원합니다’라고 부인 양분순씨와 함께 적어 넣었다. 부부가 KAIST에 거는 기대감이 얼마나 큰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날 정 이사장이 주목한 기술은 고혈압 및 당뇨 환자의 말초 혈관 혈액 흐름을 조기 진단할 수 있는 기술이다. KAIST 최철희 바이오·뇌공학과 교수 연구팀이 혈관에 주입된 근적외선 조영제(인도시아닌그린)를 광학영상장비로 촬영, 분석하는 방법으로 혈액의 흐름(관류율)을 실시간 계산하는 ‘말초조직의 기능적 혈액관류 측정기술’을 상용화, 뷰웍스에 기술이전했다.
이광형 교무 처장은 “엄청 중요한, 획기적인 기술이 나왔다”며 최철희 교수의 연구성과가 관류측정 의료기기 시장에서 산업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나타낼 것으로 전망했다.
정 이사장은 이날 혈액관류 측정기술 외에도 압축센싱 기반 초고해상 바이오 영상기술과 초미세신경 전극칩(MEA) 제작 기술, 랩온어디스플레이 구현 기술 등을 돌아본 뒤 만족감을 나타냈다.
“기부한다는 것은 소유의 끝이 아니라, 소유의 절정입니다. 많지 않은 기부금으로 새로운 학과를 신설하고, 훌륭한 시설을 만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 이사장은 연고도 없는 KAIST에 기부한 배경에 대해서도 밝혔다.
“18년간 공직생활을 했고, 18년간 창업해 기업을 이끌어 왔지만 ‘연고주의’의 그물망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표현되는 연고주의 폐단은 저에게 참으로 모질었습니다. 호남에서 지방대를 나와 사회에 발을 못붙였고, 비빌 언덕도 없었습니다.”
정 이사장은 “이 때문에 적어도 나 하나라도 극복하자, 이 맥을 끊어보자고 결심했다”며 몇가지 실천에 옮긴 일들이 있다고 언급했다. 경영권을 자식에 물려주지 않은 일과 고향사람 회사 운영에 기용 안하고 학교 출신 안따지고 능력대로 고용한 일 등을 설명했다.
“고향이나 출신대학, 종친회 기부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KAIST에 기부한 일이 잘한 일이라는 안도를 지금와서 하게 됩니다. 기부시설은 이제 나와 상관없다고 다짐했는데 (연구성과에 대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자리에 와서 부끄럽습니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