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규제는 기업들의 자유로운 비즈니스 활동을 제약할 뿐만아니라 규제 순응주의를 양산해 전체 산업 생태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법·제도로 대표되는 공적 규제는 그 둔중함으로 인해 기술 발전과 시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효과면에서도 기대만큼 성과를 이루기 어렵다.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민간업계 스스로 원칙과 기준을 정해 자율 규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전자신문이 지난 6∼7월 미국·일본·독일·프랑스 4개국을 현지 취재한 결과, 정부 중심의 게임규제는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민간 자율 규제가 정착돼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자율 규제가 방임이 아니라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업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오히려 가장 강력한 규제로 여겨지고 있다. 박수민 넥슨아메리카 부법인장은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선 업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중시하고 정부도 이를 존중한다”며 “우리처럼 사행성이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게임 이용시 나타날 수 있는 아동에 대한 프라이버시 보호에 역점을 둔다”고 설명했다.
◇ 유럽, 자율 등급심의 정착…정부는 권한 위임=우리나라와 달리 미국·독일·일본 등에서는 업계 스스로 필요에 의해 등급제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업계가 정한 기준으로 등급을 매기다보니 규제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기업 활동을 위한 안전장치로 여기고 있다. 독일 게임협회인 BIU는 1994년부터 게임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등급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심의 기구인 USK를 세웠다. 사회·종교·정부·기업 등 각 분야 대표 16명으로 구성된 권고위원회에서 독일 내 유통되는 모든 게임을 심의하고, 정부가 이를 인증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게임 기업 관계자도 2명까지 참석 가능하다. 독일 게임업체인 크라이텍 체밧 옐리 CEO는 “독일 등급제는 유럽에서 가장 엄격하지만 모두의 이해관계를 위한 것이므로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독일을 제외한 유럽연합(EU) 소속 국가들은 범유럽게임정보(PEGI)의 등급제를 따르고 있다. 2003년 발족한 PEGI는 산업 자율 규제 기구며 법적 구속력이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를 어기는 기업은 없다. 등급제의 기준과 제정에 대한 각국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끝에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이를 준수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정부 규제 반감으로 자율규제 도입한 북미=캐나다와 미국 등 북미 지역은 1994년 만든 오락소프트웨어등급위원회(ESRB)에서 게임 등급 심의를 하고 있다. 1993년 모탈컴뱃과 나이트트랩이란 게임이 ESRB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게임의 폭력성에 대해 반대해 오던 상원의원 조셉 리버맨과 허브 콜은 폭력적인 소재를 규제하자는 캠페인을 벌었다. 게임 제작자들 입장에서 검열은 수익 감소와 직결되는 것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폭력은 게임의 중요한 소재였고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은 더 현실감 있는 게임 플레이를 요구했기 때문. 이에 기업들은 엔터테인먼트소프트웨어협회(ESA)를 만들고 ESRB를 통해 자율 규제를 시작했다. ESRB에는 약 150여명의 심의위원이 활동 중이며 이 중 3명의 위원이 한 게임을 심의한다. 미국 내에서 게임 기업의 등급제 심의 참여는 자발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의 모든 게임이 ESRB의 등급을 따르고 있다. 또 ESRB의 등급을 받지 않는 게임은 유통점이 판매하지 않는다. 마이크 모하임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 사장은 “ESRB는 강제가 아님에도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며 “무엇보다 이들이 부모들에게 아이한테 적합한 소프트웨어를 사 줄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용자 참여 문호 개방한 일본=일본은 등급 심의에 이용자를 참여시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일본의 등급 심의 자율기구는 컴퓨터엔터테인먼트레이팅기구(CERO). 심사 대상은 가정용 게임이다. 2002년 10월부터 시작된 CERO에는 일반 소비자들도 일정 정도 교육을 받은 후에는 심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다. 심의 단계에서 게임 관계자는 철저히 배제한다. 히로노리 호리구치 CESA 사무국장은 “주부에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등급 심사위원단을 구성하는 것은 그만큼 객관성과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며 “일본 정부는 게임산업에 대해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CERO는 전문가·소비자 등 각계 각층으로 구성된 심의의원 중 3명이 한 게임을 평가하며, 등급은 A부터 Z까지 총 5개 단계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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