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 특이점 대학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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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능성 중에서 바람직한 미래를 선택할 능력은 있다. 우리가 스스로 미래를 바꾸지 않으면 원치 않는 미래가 달려올 것이다. 지난 6월 말 실리콘밸리에 들어선 싱귤래리티 유니버시티(Singualrity University)는 인류의 미래를 바꾸기 위한 교육계의 가장 도전적인 실험이다.

 요즘 세계 미래학계의 눈과 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있는 미항공우주국(NASA) 소속 에임스연구소로 쏠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융합기술 기반의 미래학 교육기관을 표방하는 싱귤래리티 유니버시티(이하 특이점 대학)의 첫 번째 여름학기가 9주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대학은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새로운 문명을 예견해온 발명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의 주도로 지난해 8월 설립됐다. 대학 이름도 지난 2005년 출간된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The Singularity is near)’에서 따왔다.

 그가 주장한 특이점이란 유전공학·나노공학·로봇공학 등 첨단기술의 발전속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급격한 변화의 시점을 일컫는다.

 인류 문명이 특이점에 도달하는 오는 2030년께면 컴퓨터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게 된다. 인간은 이때가 되면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기억을 다른 생명에게 이식하면서 신처럼 죽지 않는 불멸의 경지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커즈와일의 주장은 무척 엉뚱하고 과격하게 보였지만 과학자로서 엄밀한 증거에 기반을 두었기에 파장이 컸다.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무어의 법칙이 지속된다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컴퓨터의 출현은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재다능한 사업가 피터 디아멘데스는 2006년 여름 휴가 중에 ‘특이점이 온다’를 읽고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머지않아 혁명적 변화의 시기가 다가온다. 인류는 지금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그는 당장 커즈와일에게 전화를 걸어 다양한 첨단기술이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연구하는 전문 교육기관, 즉 특이점 대학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빈곤, 질병,에너지, 지구온난화 등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인류의 지혜와 과학기술을 총동원해야 하며 먼저 교육과정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피터 디아멘데스는 이미 대학원생 시절에 국제우주대학을 창설하고 X프라이즈 재단을 만들어 민간우주여행을 촉진하는 등 미국 과학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레이 커즈와일과 피터 디아멘데스. 두 사람의 만남을 계기로 세계 석학들이 한자리에 모여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는 이상적 학교의 꿈은 결국 현실이 됐다. 구글과 이플래닛 등이 거액의 장학금을 대학 설립에 쾌척했고 개인자격의 후원도 쇄도했다. 미국 나사는 캘리포니아 에임스연구소의 건물 두 동을 무상으로 빌려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특이점 대학은 지난 6월 29일 여름학기 교육과정에 들어갔다. 교수진은 바이오, 컴퓨터, 나노공학 등 다양한 첨단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자, 기업 대표를 비롯한 최고 전문가들이 담당하고 있다. 대학 측은 연말에는 기업 대표나 전문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3∼10일 단기 과정도 개설하고 내년 여름학기부터 수강생을 13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어떤 학생을 뽑아 무엇을 가르치나=특이점 대학이 내세우는 야심찬 비전은 인류의 거대한 도전을 수행할 미래 지도자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학생 선발 기준도 매우 까다롭다. 첫 입학생 40명은 13개국에서 무려 300 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특출한 인재들이다. 미국 국적의 학생은 17명으로 절반에 못 미친다. 출신성분은 평범한 대학생에서 명문대 교수, 벤처 CEO, 대기업 임원까지 다양하다. 연령대도 22세에서 47세에 걸쳐 있고 여학생이 3분의 1을 차지한다.

 살림 이스마일 학장은 “특이점 대학은 세 가지 학생 선발기준으로,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출 것, 기업가 정신이 충만할 것, 인류를 위한 거대한 도전을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특이점 대학의 커리큘럼은 다양한 학문의 영역을 넘나드는 학제(學制) 간 연구와 교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유명 기술업체, 대학에서 초빙된 강사들은 교육기간 중 첫 4주 동안 미래학, 컴퓨터, 생명공학, 인공지능, 에너지, 법률, 재무, 나노, 메디칼, 우주공학 등 10개 과목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전문가에게 족집게 과외를 받는 듯한 경험을 한다. 이후 2주간은 특이점의 핵심동력인 나노, 바이오, 인공지능, 기타 분야로 나뉘어 심화학습이 진행된다.

 나머지 3주간은 인류를 위한 도전이란 주제에 걸맞은 팀별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예를 들어 개도국의 식량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최적의 바이오 기술 활용방안을 도출하고 이러한 비전에 알맞은 기업모델을 실제로 창업하는 것이다. 그들은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기술진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벌써 여름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 주도로 벤처기업 3곳의 설립이 확정됐다. 한 팀은 회사 홈페이지까지 만들고 실제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일반 대학은 그럴듯한 제목의 논문, 보고서로 끝날 프로젝트도 특이점 대학은 다르다. 다양한 융합기술과 파이낸싱 기법이 결합돼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솔루션을 만들어낸다. 연말 시작될 열흘짜리 특이점 대학 단기코스는 기업임원들을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산업이 5년 뒤에 존재할까. 미래 휴대폰 시장은 어떠할지 같은 구체적 주제를 잡고 교육과정이 진행된다.

 ◇학문의 경계를 허물다=특이점 대학에서 목표로 하는 미래 전문가는 다양한 학문 영역을 넘나들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인재다.

 이곳에서 학제 간 교류를 중요시하는 것은 현재 인류가 직면한 미래가 기존 역사관에서 생각해온 단선적 혹은 순환적 미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이점은 다양한 과학기술이 뒤섞여 인류문명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다.

 미래가 예측하기 힘든 폭발적 형태로 다가올 때 지도자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수렴하면서 최적의 미래상을 그려나가야 한다. 따라서 미래 전문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다양한 관심사, 오픈 마인드, 학제 간 교류능력이 꼽히는 것이다. 미래사회에 어울리는 의료서비스를 개발하려면 의대생도 나노공학과 컴퓨터 기술, 미래학을 이해해야 한다.

 지난 6일 방문한 에임스연구소의 한 건물에서는 복잡한 양자컴퓨터의 최신이론과 응용 수업이 한창이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가 훨씬 많다. 상이한 첨단기술의 융합이 미래를 창조한다는 모토에 따라 전공을 불문하는 가장 진보적인 다학제 간 교육과정이 실현되고 있었다. 총 9주간 수업과 숙식을 포함한 비용은 1인당 3만5000달러에 달한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지만 구글을 비롯한 후원기업들의 장학금 덕분에 실제로 학생들이 느끼는 경제적 부담은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이곳의 교육과정에 학생 만족도는 매우 높아 보였다. MIT 박사과정을 밟다가 특이점 대학에 들어온 루크 허치슨(31)은 “특이점 대학의 다양한 교육과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우주공학수업 중 고도 9000m에서 수직낙하하는 비행기 안에서 무중력 상태를 열두 번이나 체험했다. 의학시간에는 수백만달러짜리 원격수술 로봇을 직접 조작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를 만지기도 했다.

 허치슨씨는 “각국의 똑똑한 젊은이들과 함께 10억 인류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멋진 목표에 도전하고 있다. 이처럼 놀라운 경험을 다른 어디서 해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면서 둘러본 한 강의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The future of education is Sigularity university.’(교육의 미래는 특이점 대학이다)

 ◇한국판 특이점 대학의 가능성=특이점 대학은 단계적으로 자체 교육서비스를 세계 각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VoD서비스를 위해 모든 강의를 녹화하고 아시아, 유럽지역에 분교를 설치, 원격교육을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2∼3년 내 한국에도 특이점 대학의 단기코스가 마련될 가능성이 높다.

 입학정원이 크게 늘어나는 내년 학기부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학생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경쟁률은 더욱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특이점 대학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둘지, 미래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꿀지는 좀 더 기다려 봐야 한다.

 그럼에도 과감한 교육제도의 혁신으로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미국의 행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미국의 특이점 대학을 겨냥한 학원 장사가 아니라 미래사회에 맞춰 후진적인 교육시스템을 뜯어 고치는 근본적 개혁이다.

 세계에서 변화속도가 가장 빠른 대한민국이야말로 첨단 융합기술에 기반을 둔 미래교육기관을 설립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한반도의 미래를 준비하는 한국판 특이점 대학의 설립을 정부나 민간차원에서 검토할 시기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미국)=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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