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5일 첫 발병 소식이 알려진 ‘인플루엔자A(신종플루)’의 기세가 누그러질 줄을 모르자, 방송통신위원회에 때아닌 비상이 걸렸다.
이미 두 달 전부터 계획된 최시중 위원장과 국장들의 미국 출장이 방통위 내부에서 ‘죽음의 출장(?)’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 추이를 지켜보던 방통위는 국제협력관을 중심으로 국·과장들이 회의를 열어, 사실상 ‘출장 불가’ 쪽으로 가닥을 잡고 위원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당시 실무진의 고민은 ‘무리하게 출장을 감행했다가 불상사가 생길 때의 정부 책임론, 이미 수개월 전에 확정된 약속을 파기하는 외교적 신뢰’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실무진의 고민은 “국가 간 약속인데, 그러면 되나”라는 최시중 위원장의 한마디로 정리됐다. 전 세계 국가가, 특히 미국이 국경 폐쇄 조치를 내려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비상사태라면 모를까 엄연히 왕래가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상대방이 ‘방문 연기’를 피력하지도 않은 마당에 FCC 등 미국 정부와 주요 기업들과의 약속을 먼저 제안한 측에서 일방적으로 깨는 통보는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함이었다. 그렇게 최 위원장은 반신반의하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4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교롭게도 최 위원장이 출국한 지난 4일. 미국 국토안보부는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플루엔자A가 평범한 일반 독감 수준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최 위원장의 첫 출장지인 미국 워싱턴에서는 인플루엔자A를 우려한 ‘마스크’를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FCC도, 타임워너도, 클리어와이어사도, CNN뉴스센터도 어느 곳 하나, 인플루엔자A에 따른 동요가 없었다. 최 위원장의 ‘국가 간 약속인데’라는 소신이, 결과적으로 한국 외교상의 큰 과오를 하나 덜었다.
행사의 경중을 가름하기는 쉽지 않지만, 인플루엔자A의 기세에 눌려 외교와 비즈니스상의 중요한 방미 행사가 취소됐거나 취소되고 있다. 5일과 6일 워싱턴에서 개최 예정이던 올해 첫 한미 재계회의도 그중 하나였다.
볼티모어(미국)=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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