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2009년, 에너지에 관한 전 세계의 관심이 절정에 달한 시기다. 자원고갈, 기후변화, 정치·경제적 이윤, 글로벌 주도권 획득….
관심을 쏟는 이유는 각 경제 주체마다 다르다. 그래서 이들이 중요하다고 보는 에너지원에도 차이가 크다. 누구는 신재생에너지를 강조하고 다른 사람은 원자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라고 주장한다. 청정기술의 발전에 따라 석탄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될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같은 신재생에너지파(派) 안에서도 태양광, 풍력, 지열 등 많은 에너지 원천에 대한 각자의 우선순위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결국 이 에너지들은 결국 ‘전기’라는 한 점으로 수렴된다. 태양열이나 지열같은 일부 열원(熱原)을 제외하면 에너지원이 그대로 산업 현장이나 가정에서 쓰이는 일도 없거니와 쓸 수도 없다. 바람의 회전에너지, 조수간만의 위치에너지, 태양광의 광전효과는 종국적으로 전기로 바뀌어 필요한 곳에 공급된다. 현대의 모든 시스템은 전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7세기 프랑스 작가 라 퐁텐의 말은 이렇게 치환된다. “모든 에너지는 전기로 통한다.”
◇현재 전력망의 한계
이 때문에 여러 에너지원을 전기로 바꿔서 필요한 곳에 적절히 배분해 주는 전체 시스템, 즉 발전, 송전, 배전을 아우르는 전력망(그리드)의 중요성은 말로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아예 말로 할 수가 없다. 표현된 말은 실체의 일부분밖에 보여 주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매우 아쉽게도 현재의 전력망은 구시대적이다. 한국전력공사같이 전기를 공급하는 주체는 전기를 누가, 얼마나 필요한지, 또 얼마나 사용하는지, 낭비되는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한 예로 한전은 전기 공급량을 조절하는 기준을 60헤르츠(㎐)라는 표준 주파수에 두고 있다. 60㎐보다 주파수가 떨어지면 예비 발전소를 가동하고 주파수가 높아지면 가동률을 줄인다. 어림짐작의 성격이 클 수밖에 없다. 이건 한전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다. 100년도 전에 에디슨과 테슬라가 설계한 전력망 시스템 자체의 한계다.
◇전력망의 미래, 스마트그리드
이 한계를 느낀 사람들은 십여년 전부터 전력망의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통신, 네트워크, 소프트웨어(SW) 기술을 활용해 전력망을 업그레이드하면 발전, 송전, 배전 현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안정화함으로써 전력공급량 부족이나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게 기본 아이디어다. 여기에 양방향 통신을 적용하면 기업 현장이나 가정의 전력 수요를 실시간으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전력수요를 조절하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더해졌다. 어디 그뿐인가. 풍력, 태양광처럼 시간에 따라 발전량이 급변하는 수많은 신재생에너지원을 전력 공급망과 조화시켜야 한다는 요구도 대두됐고 남는 전력을 지금처럼 버리지 말고 모아 뒀다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개념이 바로 지능화 된 미래의 전력망, 즉 스마트 그리드(smart grid)다.
스마트 그리드는 특정한 기술이나 제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네트워크화된 사회를 일컫는 ‘유비쿼터스’처럼 현재 전력망보다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지능적인 시스템이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미래 사회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따라서 스마트 그리드를 주장하거나 추진하는 기업이나 단체, 정부마다 구체적인 정의에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하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통신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전력망의 모든 요소가 네트워크로 동등하게, 또 긴밀히 연결된다는 점. 홍준희 경원대학교 교수는 이를 “형광등은 1000원짜리고 원자로는 2조원짜리지만 스마트 그리드에서는 둘 다 하나의 단말기라는 점에서 똑같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스마트 그리드의 결과가 전력회사뿐만 아니라 소비자, 국가경제, 환경에 모두 이익이 된다는 생각이다.
◇산적한 과제들
스마트 그리드를 달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008년 12월 미국 전기자문위원회(EAC)는 ‘스마트 그리드:새로운 에너지 경제의 동력원’이란 보고서에서 스마트 그리드 달성의 과제로 규제, 전력사업자 사업모델, 전력산업 전체의 공조전략 부재, 비용, 안정성 등 8개를 지목했다. 기술적인 이슈도 많다. 송전자동화(transmission automation), 배전자동화(distribution automation), 신재생에너지시스템과 전력망의 통합(renewable integration), 스마트 미터링(smart metering), 분산전원 및 안정적인 에너지저장시스템 구축(distributed generation & storage) 등 어려운 기술적 성과를 달성해야만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분야 중 하나가 수요처의 전력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게 하는 스마트 미터링 분야다. 전력회사도 아닌 구글은 지난 2월 지난달 가정이나 사무실의 실시간 전력 사용량을 보여주는 ‘파워미터’ 애플리케이션을 선보였다. 우리나라에의 LS산전도 최근 이와 비슷한 기능의 스마트 계량기의 모델 제품을 내놓은 바 있다.
◇미래시장 주도 전쟁도 시작됐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스마트그리드를 위한 경주가 치열하다. 미국 정부는 지난달 내놓은 경기부양책에서 스마트 그리드 분야에 110억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밝혔고 EU도 수년 전부터 집행부 내에 유럽에 스마트그리드를 구축하려는 목적의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전력분야 기술이 세계적인 우리나라도 빠지지 않는다. 정부는 올해 안에 지능형 전력망의 로드맵을 만들고 2011년에 시범도시를 건설해 2030년 전국의 스마트 그리드를 완성시키겠다는 계획이다.
경쟁의 배경엔 당연히 스마트그리드로 창출될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전제돼 있다. 미국은 조만간 근 50년 전에 구축해 노후화할 대로 노후화한 전력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끝나면 그 다음은 유럽이 열릴 수밖에 없다. 아직 전력망 자체가 부족한 중국은 그 자체로 언제 열릴지 모르는 광대한 스마트그리드 시장이다. 이 시장 규모를 몇 조, 몇 십조원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통이 작은 계산법이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앞으로 스마트그리드 관련 전체 시장 규모가 족히 수천조원에 이를 것으로 본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전력IT사업단 등을 통해 수년 전부터 비교적 일찍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앞으로 스마트그리드 시장 경쟁은 미국·EU·일본·한국의 4강이 주도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미래 에너지, 그리고 미래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고민과 개발은 벌써 시작됐다. “미래의 모든 에너지는 스마트 그리드로 통하게 될 것이다.”
최순욱기자 choisw@etnews.co.kr
◆용어설명:전기와 전력=전기는 전자나 이온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생기는 에너지의 형태를 말한다. 전기에는 음전기와 양전기 두 가지가 있다. 같은 종류의 전기는 밀어내고 다른 종류의 전기는 끌어당기는 성질을 띤다. 그리고 전기가 흐르는 것을 전류라고 하고 전류가 단위시간에 하는 일 또는 사용되는 에너지의 양 이나 값을 전력이라고 부른다. 이를 식으로 표현하면 ‘P(전력)=V(전압)×I(전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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