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융합형 산업은 블루 오션을 창출할 수 있다. 로봇 기술을 의료 산업에 결합해 성공을 거둔 수술 로봇 ‘다빈치’가 좋은 예다. 로봇 수술에서는 환자의 몸에 몇 개의 작은 구멍을 뚫고 여기에 카메라와 로봇 팔을 삽입한다. 의사는 외부 조종석에 앉아 카메라가 전달하는 영상을 보면서 원격으로 로봇 팔을 조작해 수술을 진행한다.
1999년에 세계 최초로 출시된 ‘다빈치’는 현재 수술 로봇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미국의 병원에는 이미 400대가 넘게 설치됐고, 우리나라에도 현재 대형 병원 중심으로 20대 정도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당 가격은 ‘횡포’에 가까운 30억원이다. 블루 오션을 창출한 것이다.
성공 스토리는 언제나 화려하게 포장될 수 있지만, 성공은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융합형 콘텐츠로 블루 오션을 창출하는 것 역시 쉬울 수만은 없다.
국내에서도 일부 선도적 연구개발자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융합형 콘텐츠 산업과 시장을 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상 및 3차원 그래픽스 기술을 전통적 제조 산업에 접목하는 노력이 몇몇 분야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들은 초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는데, 그것은 상대방 분야의 요구를 본인의 주관대로 판단하는 경향 때문이었다.
상당수의 기술자는 본인이 보유한 기술의 탁월성을 믿고 그 기술이 타 산업에 쉽게 전파되고 접목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성공적인 융합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빈치’의 예를 들어보자. ‘다빈치’ 등장 이전에 이미 복강경 수술이 있었다. 환자의 몸을 절개하는 대신 구멍을 뚫고 기구를 넣어 수술하는 복강경 수술은 개복 수술에 비해 큰 진전이었다. 하지만, 기구가 움직일 수 있는 각도가 제한돼 정교함을 요하는 수술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다빈치’는 마치 사람의 손과 팔처럼 회전할 수 있는 로봇을 사용해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게다가 영상 역시 스테레오로 확대해 보여 준다. 복강경 수술 의사들이 가려워한 곳을 긁어 준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렇게 수요를 정확히 파악해도 융합은 항상 어려운 것이다. 새로운 것의 도입은 대부분 기존 시스템의 변경을 요구하고, 이는 언제나 저항에 부딪힌다. 예를 들어, 영화 특수효과 제작에 쓰이는 수많은 소프트웨어 중 성능이 불만스러운 한 가지를 신규 제품으로 변경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회사의 프로그래머와 디자이너들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받게 된다. 하물며 생소한 ‘콘텐츠 기술’을 사용하자고 제안하면 기존 산업의 어느 누가 이에 쉽게 응할 것인가.
여기에 정부 및 산하기관의 역할이 있다. 다양한 융합형 콘텐츠 기술의 구현 사례를 R&D 사업으로 보여줘야 하고, 실제로 서비스도 가능하다는 것을 시범사업을 통해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되는 모습’을 여러 개 보여줘도 산업계는 그중 대부분을 외면할 수 있고, 시장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빈치’의 뿌리는 스탠퍼드 대학 부설 연구소에서 미국 정부의 지원 하에 수행한 연구과제에 있다. 미국 정부는 해외에서 전투 중 부상한 병사들에 대한 원격 수술용으로 이 연구를 지원했다. 스탠퍼드 대학 연구진과 정부 관계자 모두 이 기술이 미국 내 병원에서 그렇게 대중화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술을 발견하고 회사를 설립해 제품으로 상용화한 것은 벤처 사업가의 몫이었다.
탁월한 IT 인프라의 ‘다이내믹 코리아’는 융합형 콘텐츠 산업을 육성할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연구개발자의 진지한 노력과 정부의 적절한 지원이 병행된다면 성공의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 정부는 지난해부터 문화부를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융합형 콘텐츠 육성 전략을 수립하고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많은 기대를 해 본다.
한정현 고려대학교 컴퓨터·통신공학부 교수/jhan@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