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약이 무효예요. 아무리 아등바등거려 봐야 용 빼는 재주가 없습니다. 현실을 타개하겠다고 노력해 봐야, 꽉 막힌 도로에서 빨리 가겠다고 버스 안에서 뛰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 전 지인과의 통화에서 안부를 묻자 대뜸 암울한 현실 얘기를 먼저 꺼냈다. 그러면서 상황이 ‘글로벌IMF’인지라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이미 쏟아진 소나기인데 뛴다고 비 안 맞겠습니까. 옷 다 젖었다면 차라리 소나기의 시원함을 느끼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죠.” 나의 대답이었다. 사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내 자신도 모르겠다. 무심결에 위로의 말이라고 했는데, 듣기에 따라선 힘 빠지게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대통령도 “여러분, 요즘 참 힘드시죠”라는 말로 말머리를 시작하는 판이다. 세계 경제가 장기불황의 초입에 있다는 말을 누구나 쉽게 꺼낸다. 상황을 정확히 알든 모르든, 주변의 흘러가는 얘기에 모두 감염돼 버렸다. 또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굳어버린 마음을 재확인한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마저 닫아버리는 사태로 흘러가고 있다. 이미 10년 전 ‘한파’를 경험한 사람들은 악몽이 다시 떠오른다. 포털사이트에서 ‘제일은행 퇴사자들의 비디오’ 클릭 수가 높아지고 있다. 어쩌면 그 비디오를 현실에서 다시 볼지 모른다는 악령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우려는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현실의 어려움을 만든 일부 대상에 대해 마녀사냥식 성토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 정부의 경제팀이 야속하기만 하고 실책에 대해 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욕하고 비난한다 한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욕을 해서 속이라도 후련하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도 된다. 문제는 싸잡아 욕한 다음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것인지다. 결국 한탄만으로 끝나는 불신과 질시라면 침체의 나락에서 헤어날 길은 요원하다. 대안 없는 비판은 허탈감을 더할 뿐이다. 안 그래도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부정적 심리가 득세한다면 경제문제를 떠나 심각한 사회문제까지 우려된다.
우리나라는 36년 일제 강점도 견뎌왔고 전쟁통에서도 버텨왔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고사리손마저 빌려 경제를 일으켰다. 아침마다 새마을 운동가도 불렀다. 맨손으로 경부고속도로를 깔고, 또 방심하다 IMF도 맞았다. 현대사의 굴곡을 다 겪으면서 웬만한 어려움은 다 체화했다. 그 와중에 초고속 성장을 한 동인은 무엇보다 ‘긍정의 힘’이다. 처음은 군대문화와 ‘삽질경제’로 시작된 1차원적 산업이었지만 정보통신산업과 선진문화로 고도화되기까지 저변에 ‘긍정적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경제는 심리’다. 된다, 된다 하면 안 될 일도 된다. 긍정은 때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뜻밖의 성과를 낳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암울한 경제뉴스나 단발성 지원책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인 ‘희망계획서’다. 신명을 찾고 일할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 역시 세월이 지나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그땐 참 어려웠지…” 하며 추억거리로 남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기업이 나서 ‘전 국민 좌절금지 프로젝트’로 희망을 안겨줄 어젠다 하나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현실적인 일일 게다. ‘긍정의 힘’을 믿어볼 때다.
이경우부장@전자신문, kw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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