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지금, 곳간문을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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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내 모 은행 지점장은 아침부터 몰려드는 대출자들로 점심도 제때 먹지 못했다. 그가 점심식사 이전에 만난 사람은 20명. 전부 중소기업 사장이다. 이 중에 대출을 승인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때늦은 점심 숟가락을 든 지점장은 연신 ‘죽겠다’는 말만 되뇌었다. “아는 처지에 아쉬운 소리하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 보내자니 마음 한쪽이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사 방침이 중소기업 대출을 최대한 억제하라는 것이고, 대출을 많이 해준 지점장은 인사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것이어서 운신의 폭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기침체가 극으로 치닫다 보니 유동성 위기에 몰린 중소기업이 흑자도산의 비운을 맞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환차손은 허탈감을 배가한다.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L사장은 요즘의 상황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한다. “그때(외환위기 당시) 1주일 사이 100억원에 달하는 환차손을 당하니, 차라리 죽고 싶었다. 지금도 그때에 못지않다”고 어려운 경영환경을 토로했다. 중소기업의 환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한 키코(KIKO)는 오히려 발목을 잡고 정부의 환율을 잡기 위한 대책도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못내 미국의 금융 위기를 아쉬운 한탄의 눈초리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 선진금융이라며 돈이 돈을 지배하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냈던 월가의 신화도 고개를 숙였다. 금융에서의 펀더멘털은 곧 산업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는 사건이다. ‘발등의 불’이 먼저던가. IMF 당시 미국의 금융구조를 선진금융이라며 전가의 보도처럼 따라하기 바빴던 후진금융(?)의 한계가 안쓰러울 따름이다.

 외환위기 상황은 아니라지만 중소기업 경영자들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키코로 물어줘야 하는 돈이 쌓여 있다. 지난해 말보다 30% 가까이 오른 환율에 원자재 수급이 어렵다. 폭등한 원자재 가격을 공급업체에 전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소기업 대부분이 가격에 민감한 제조업이다 보니, 납품가격 인상은 자칫 어렵게 잡은 공급처마저 끊게 할 수 있다. 은행 문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중소기업에 은행의 ‘비 오는 날 우산 뺏는’ 관행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기아 직전의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는 말처럼 정부에 기대기에는 한계가 있다. CEO 대통령을 자청한 이명박 정부도 확산되는 국제금융 위기와 고환율에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잇따라 중소기업 진흥책들이 나오지만 한 끼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구휼미’에 불과하다. 답은 역시 다소 여유로운 곳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옛부터 흉년이나 기근이 들면 지주와 거부들이 먼저 곳간문을 열었다. 베품의 의미 이전에 소작농이나 마을 사람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 놓아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생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곳간에서 인심 나고, 다시 인심이 곳간에 가득 차는 선순환의 고리가 상생의 시작이다. 현재로선 사면초가의 중소기업을 구해낼 은인은 대기업밖에 없다. 지금의 위기를 대기업인들 피해갈 수 있겠냐마는 상대적으로 중소기업보다 낫기 때문에 나눠 쓰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 그래서 하도급 중소기업에 전액 현금 결제하기로 한 LG디스플레이의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이경우부장@전자신문, kw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