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키코`로 돈 버는 은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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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일 국내외 신문들의 1면은 파산 신청한 미국 리먼브러더스 직원들의 사진이 장식했다. 우울한 표정으로 소지품이 든 상자를 든 채로 회사문을 나서는 장면이다. 문득, 10년 전 퇴출당한 우리나라 은행원들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정부의 5개 시중 은행 퇴출 발표를 시작으로 은행들이 잇따라 통폐합됐다. 2000년까지 은행에 종사했던 사람의 20%가 이렇게 직장을 잃었다. 제일은행 퇴직자들을 그린 ‘눈물의 비디오’는 살아남은 은행원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인의 눈물샘까지 자극했다. IMF 한파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신세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에 이들을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남의 불행을 즐기는 성격 파탄자들인가. 아니다. 단지 은행을 미워했던 사람들이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인에게 은행 문턱은 ‘만리장성’만치 높았다. 오랜 신용을 쌓았건만 잠시 자금난을 겪는다고 곧바로 어음을 돌린 거래 은행도 있었다. 자식 학비 대려고 대출받으려는 사람에게는 이것저것을 저당잡으면서 은행원들에게는 무이자로 몇 천만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서민과 중소기업인에게 은행은 상전 중의 상전이었다. “이러면 안 되겠지만 고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같이 신용을 쌓은 사람도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데 하물며 일반 서민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당시 만났던 한 중소기업 사장이 이렇게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0년 새, 금융권도 많이 변했다. 견실해졌다. 성사되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하겠다는 글로벌 야심을 내비친 은행도 있었다. 눈에 띄는 차별도 없어졌다. 정말 환골탈태했는가. 아니다.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중소기업인과 서민에게 은행 문턱은 여전히 높다. 더 나빠진 측면도 있다. 몇 개월째 논란이 지속된 키코(KIKO:Knock-in Knock-out) 상품이 그렇다.

 키코는 환율변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통화옵션 상품이다. 그렇지만 변동폭이 크면 위험하다. 문제는 이 위험이 가입자에게만 전가된다는 점이다. 환율이 지나치게 높으면 약정액의 1∼2배에 이르는 환손실을 입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없던 일이 된다. 은행이 손해볼 일이 없다. 대기업이 이 상품을 기피하는 이유다. 중소기업 손실 규모가 벌써 2조∼3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돈다.

 물론 잘못이야 꼼꼼히 살피지 못한 중소기업에 있다. 그렇지만 이런 위험보다 환차익만 더 강조한 은행 측 설명을 믿은 중소기업이 많다. 거래 은행이 그랬다면 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130여개 키코 피해 업체는 계약 무효 소송을 벌인다. 법무법인을 선정하고 신한·외환·SC제일·씨티 등 키코 상품의 70% 이상을 취급한 은행과 일전을 벌일 태세다.

 우리 금융권은 또 한번의 구조조정을 앞뒀다. 미국발 금융 쇼크로 더 급진전할 것이다. 10년 전처럼 국민 혈세로 만들어진 ‘부실채권정리기금’의 덕을 다시 볼 은행도 나올지 모른다. 정부가 최근 이 기금의 이익금 일부를 은행에 돌려주려다 반발을 샀다. 은행과 정부는 왜 반대가 많은지 알아야 한다.

 “환손실이야 당연히 우리 책임이지요. 그냥 탕감해달라는 얘기 안 합니다. 그래도 많은 기업이 흑자 부도나 회사를 팔아야 하는 지경에 처했다면 다른 구제 방법을 찾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부도 똑같아요.” 수출액을 계획보다 수십억원 더 늘리고도 ‘키코’로 한푼도 건지지 못했다는 한 중소기업체 사장의 원망 섞인 푸념이다. 그의 모습은 마치 10년 전, 그 사장을 꼭 닮았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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