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연에는 투서가 참 많습니다. 그만큼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죠. 그런데 요즘 세태를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정부에 공개적으로 외치는, 용기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안 보이니 말입니다.”
기능 개편 소문에 속앓이만 하고 있는 정부출연연구기관 말단 연구원의 한탄이다.
출연연이 ‘돈줄’을 쥐고 있는 정부의 기능개편 방침에 한없이 끌려가고 있다. 종착역이 ‘도살장’인지, ‘천국’인지 따져보고 가자는 사람이 없다. 그런 말을 내뱉는 것 자체도 언감생심 어려운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출연연 내 부서별, 상하 간 처지와 일처리도 다르다. 일부에서는 밤을 새워가며 원천기술, 미래성장동력, 국가 고유 R&D 미션 찾기에 골몰하며, 마땅한 아이템을 찾고 있다. 그렇다고 그럴 듯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반면에 아랫단에서는 은근히 밀려오는 불안감에 일손을 놓고 있다. ‘뭔가 일이 있긴 있는데, 도대체 뭐라는 거야’라며 온갖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벌어지는 현상이다.
최근의 일만 해도 그렇다. 지식경제부 산하 출연연들이 연일 ‘고유 미션 발굴을 위한 비상대책회의’로 파김치가 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2∼3주 전 경영효율화 방안을 마련하며 치렀던 홍역을 지금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뾰족한 답은 없다. 정부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온 탓이다. 그래서 불만도 만만치 않다. 언제, 단 한 번이라도 출연연 자율로 맡겨둔 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한때 ‘돈벌이’ 연구를 하라고 해서 그런 연구하기에 급급했고, BT니 NT니 하면서 트렌드 대로, 주문하는 대로, 예산 밀어주는 대로 움직여 왔다. 심한 말로 출연연들이 원천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보따리’ 연구를 시킨 것도 정부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다른 주문이다. R&D 정책과 방향에 대한 공감도 없이 말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그동안 R&D 트렌드의 사각에 놓여 있던 한국지질자원연구원과 한국천문연구원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시류에 따라 정부 예산을 받지 않았으니 구조조정하려야 할 것도 없고, 기관 볼륨도 방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연구원들은 지금의 불안한 정세가 모두 정부의 정책 혼선이 초래한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4·9 총선 이후 한때 기관장 물갈이와 조직개편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아가던 정부의 과기정책을 지금 원점에서 다시 점검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출연연을 개편하기 전 출연연이 무엇을 해야 하고, 향후 역할은 무엇인지, 지금까지는 어찌해 왔는지 명쾌한 분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지경부 산하 출연연들이 이제 와서 날 새워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날 새운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니다.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논의할 소통의 장이 일단 없다. 모두 윗단, 즉 경영진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정보의 부재와 무교류에서 오는 직원 간 괴리감으로 인해 사태 대응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효율성 측면에서 논의시간을 줄일 수 있고 의사전달 속도가 빠른 장점은 있지만 언젠가는 화합과 공감대를 포기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광우병 사태처럼.
박희범 전국취재팀장 hb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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