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더듬수에 발목잡히다

 ‘더듬수’란 말이 있다. ‘더듬거리는 척하며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려고 엉뚱한 일을 벌이는 말이나 수작’을 말한다. 걸리면 좋고 안 걸리면 그만인 술수다. 하지만 술수 이면에는 고도의 계산과 치밀함이 숨어 있다. 얼렁뚱땅 얼버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빠지면 헤어나오기 쉽지 않은 늪이다. 방심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더듬수’가 말해준다.

 곤충에게는 더듬이가 있다. 방향, 물체의 확인 등 미세한 감지능력을 가진 곤충들만의 감각기관이다. 더듬이는 청각, 후각 촉각을 동원해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먹이를 찾는 1차 탐지기관이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탐지기관 정도가 아니다. 흡사 뇌처럼 ‘생각세포’가 모두 몰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듬이는 더듬수의 숨겨질 칼날이다.

 한국이 또 한번 더듬수에 걸렸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말도 안 되는 중국인들의 폭력시위사태에 자존심이 구겨졌다. 게다가 타국의 수도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에서 ‘주눅’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뭐가 잘못되었느냐’는 적반하장의 당당함까지 묻어났다.

 대사까지 나서 폭력을 정당화하는 언사에 기가 찰 뿐이다. 그 당당함에 공권력은 기가 눌렸고, 이방인의 폭력에 이 땅의 주인들만 흠씬 두들겨 맞았다. 더 억울하고 한심한 일은 계획된 대형 폭력사건 앞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처벌의 잣대이다.

 더듬수는 한번 약발이 먹히면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이번 폭력사태는 예고된 사건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역사를 훔쳐가는 ‘동북공정’앞에서도 그랬다.

 역사를 강탈당할 위기에 전 국민이 울분을 토할 때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은 “정부가 나설 문제가 아닌 학계가 나서야 할 문제”라는 말로 피해가기 바빴다. “정부가 나서면 오히려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역사가 어떻게 정부의 몫이 아닌 학계만의 몫인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말로 기록될 것이다. 또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더더욱 아닌데도 말이다. 결국 ‘일단 저지르고 보는’ 더듬수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한번 약점을 보인 먹잇감은 더듬수를 부릴 수 있는 최적의 상대이다. 중국은 경제성장의 굵은 획을 그은 한 외국기업들에게 느닷없이 ‘신노동계약법’을 적용했다. 치솟는 원자재가격 상승에 인건비 상승까지, 외국기업은 견디지 못한다. 여기에 고부가기술을 요구하고 자국 유치를 위해 자랑하던 특혜도 슬그머니 줄었다. 결국 빈손으로 야반도주하게 만들고 야반도주했다고 욕을 한다. 이웃국가로 경제대국으로 중국과 관계를 무시할 수 없지만 상처로 남는 부산물이 너무 많다. 더듬수를 놓는 중국인의 상술에 매번 당하는 꼴이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런 더듬수에 휘말릴 것이냐이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는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를 용인하는 요소들은 이해할 수 없다. 굴욕적 외교, 자국민과 자국기업에 대한 냉대 등 역차별의 원성이 높아도 그간 무기력한 정부는 모른 척했다. 더듬이를 숨긴 덫을 사방에 뿌려대는 중국과 ‘장님 지팡이’로 이를 헤쳐나가려는 한국의 대응이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더듬수는 그냥 놓는 게 아니다. 걸려들었을 때 먹잇감의 요리방법까지 생각하는 잔인한 술수다. 포식자의 탐식에 먹잇감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더듬수 대책반’이라도 꾸려야 할 것 같다.

  이경우부장@전자신문, kw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