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드라마라고 할까. 학창시절부터 1991년 창업 이래 지금까지 계속된 반전. 창업 17년 동안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대표적인 이동통신 부품과 장비업체로 키운 김덕용 KMW 사장(53)이 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벤처기업이 영속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 시련이 있었기에 지금처럼 우뚝 설 수 있었다는 그의 요즘 관심사다. 외환위기 때 100억원가량의 흑자를 내고도 도산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한 김 사장은 이제 누가 CEO로 오더라도 롱런할 수 있는 근간을 만드는 게 목표다. ‘기업은 죽어도 기업인은 산다’가 아니라 ‘기업인은 죽어도 기업은 살 수 있는’ 토양을 가꿔 나가야 한다는 김 사장. 국내보다 해외에 머무는 날이 많은 그를 10여년 만에 재회했다.
◇학창시절의 반전=김 사장은 일반 중학교가 아닌 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때 학교대표로도 출전할 만큼 육상에 재능을 보인 그는 육상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운동을 핑계로 공부와 담을 쌓다 중학생 김덕용은 2학년 말 무렵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고등학교도 못 가보는 거 아냐?’. “어린 마음에도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동을 그만뒀죠.”
3학년이 됐지만 공부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터라 막막했다. 1학기 마치고 여름방학 때 실습 들어간다고 어느 회사에 이름을 넣어 놓고는 학원으로 내뺐다. 죽기 살기로 공부에 몰입한 덕에 그해 11월 인천고에 합격했다. 인천공업중학교 160명 중 유일하게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첫 번째 반전이다.
늦게 시작한 공부가 재미있었다. 열심히 했다.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신입생의 필수 코스인 미팅이나 음주, 당구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강의실과 도서관밖에 몰랐다. 새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유학을 가 박사학위를 따고 대학교수가 되는 꿈이다. 미친 듯 공부한 덕에 당시 한 대학에 한 명밖에 못 받던 육영장학금을 받았다. 3학년 마치고 입대했다. 통신병이었는데 전방근무를 자청해 전공 서적과 씨름했다. 제대 두 달을 남겨두고 나온 말년 휴가 때 또 한 번의 반전이 그를 기다렸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머니는 공장 식당에서 공원들 밥을 해주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집에 뭔가 해줄 능력도 안 되고 해서 어떻게 하든지 국비 장학생 자격을 얻어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이었다. 막상 집에 들어서니 5∼7년간의 유학이 사치로 느껴졌다. 장남이면서 어머니가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나 하나 잘되자고 유학길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고생스러워도 장남이 더 공부하기를 바랐다. 대학교수 아들을 두는 꿈도 꾸었을 터다. “군대 가서 철든다고 하더니 철든 게 맞긴 맞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김 사장은 유학의 꿈을 접고 취업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남들은 군을 마치고 복학하면 정신 차려 공부한다는데 이때만큼 잘 놀아본 적도 없었다고 김 사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위기와 극복=직장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는 ‘언젠가는 내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장 생활 10년 만에 단돈 5000만원을 들고 신도림동 쪽방에서 창업했다. 오늘날의 KMW다. 97년까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코리아마이크로웨이브라는 이름도 KMW로 바꾸고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미래 청사진도 펼쳤다. 매출 450억원에 100억원 흑자였다. 회사가 너무 잘나가니까 은행들도 저마다 좋은 조건을 들고 돈 보따리를 싸들고 거래하자며 찾아왔다. KMW는 96, 97년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던 참이었다. 심지어 은행들은 ‘KMW에게는 금고문 열어놨으니 언제든지 갖다 쓰라’라는 식이었다.
그것도 잠시 97년 말 외환위기가 불어닥치며 KMW에 암운이 몰려왔다. 은행돈으로 투자하던 시절이다. 회계상으로 100억원의 흑자를 냈지만 실제로 회사의 현금흐름은 여의치 않았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난리가 났다. 은행은 더 이상의 대출이 어렵다고 했다. 받아놓은 S사나 L사의 어음은 할인이 안 됐다. 진짜 난리가 난 것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했던가. 여기저기 자금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약속했다. 98년 1년간은 구조조정하지 않겠다고. 열심히 일해서 위기를 극복해내자고 했으나 1년 동안 구조조정을 안 한 대가는 혹독했다. 엄청난 적자가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흑자도산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99년 들면서 외환위기가 끝나자 개인 주식을 팔아 100억원이라는 목돈을 만들어 회사에 기부했다. 대만산업은행에서 1000만달러를 자본 유치해 메웠다. 서서히 회복해 2000년 3월 상장에 성공했다. 기쁨도 잠시, 2001년까지 매출이 잘 올라가다가 2002년부터 또다시 추락의 길로 들어섰다. 정보통신 시장이 위축됐기 때문이다. 자금난까지 겹쳤다. 고작 1억대인 아파트마저 넘어가는 것 아닌지 걱정하기도 했다. 2001년 이후부터 네 번에 걸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01년에 1000에 이르던 직원이 400명까지 줄었다. 끝이 안 보일 것 같던 위기는 2005년말을 기점으로 2006년과 2007년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비결은 수출이었다.
◇007 가방과 늦둥이의 축복=내수 위주의 사업구조다 보니 국내 시장의 변화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게 해외시장이다. 당시 내수 90%가 요즘 거꾸로 수출 90%다.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200만마일 이상 날아다녔다. 김 사장은 “외환위기가 나로 하여금 국내에서 세계시장으로 나가라고 강제로 등 떠민 것”이라며 “그게 전화위복이라는 것 아니겠냐”며 웃음 지었다. 그가 들고 다니는 누런 007가방의 손잡이는 까맣게 때를 타고 닳았다. 지금도 해외출장길의 든든한 친구다.
김 사장에게는 또 하나의 복덩이가 있다. 97년 12월에 태어난 늦둥이다. 외환 위기로 회사에서는 죽을 맛이었지만 집에 들어가 막내 아들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회사일을 잊었다. “늦둥이가 없었으면 맨날 술 먹고 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집에 들어가 잠시라도 회사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97년 승승장구하며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지 않고 2000년까지 갔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됐을까. 김 사장은 “97년만 해도 외환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는 상태에서 어려움이 닥쳤고 진짜 힘들었지만 어려움을 이겨냈다”며 “마찬가지로 2001년도 이후 장기 침체 늪에 빠졌을 때도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극복해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지난해 KMW가 매출의 90%를 넘는 1억달러를 수출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IT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김 사장은 설명했다. 실제로 외환위기라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오늘날 KMW가 단단해질 수 있었고 수출기업으로써 글로벌 경쟁을 할 수 있는 체질도 만들어졌다.
◇유비무환·핵심경쟁력은 R&D=김 사장은 요즘 잘될 때 어려울 것을 대비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다시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기 위해, 탄탄한 체질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상당한 성장이 예상되지만 다가오는 2009년과 2010년 이후 KMW에 닥쳐올지 모를 제2의 위기에 대비한다. 자신감이 있다. 서울 신도림동과 경기도 광주 망포리에서 시작했던 RF부품이 당시만 해도 전량 수입에 의존했는데 지금은 최강자가 된 경험에서 우러나온 자신감이다. 비전도 있다. 원천은 연구개발(R&D)이다.
“기업이 성장발전하게 되는 핵심경쟁력은 자본·영업 마케팅·품질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KMW의 성장동력은 단연 R&D에 의한 기술”이라고 꼽았다. KMW가 예뻐서 제품을 사주는 것보다는 반드시 써야 하기 때문에 사서 쓰는 일이 많다는 설명이다. 기술이 밑바탕에 깔린 덕분이다.
김 사장은 3년 앞을 바라보고 5년 앞을 내다보면서 계속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 매출이 적을 때나 많을 때나 똑같다. 매출이 적을 때는 매출의 거의 20%까지 R&D에 쏟아부었다. R&D에 필요한 돈은 은행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게 김 사장의 지론이다.
김 사장이 생각하는 KMW의 비전은 대기업이 아닌 무선통신 전문기업이다. 세계에서 경쟁력을 발휘하는 그런 전문업체다.
◆김덕용 사장은=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인천고와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대영전자공업과 대우통신에서 일했다. 삼성휴렛패커드를 나와 1991년에 코리아마이크로웨이브를 창립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벌레였고 창업한 이후 KMW의 R&D 중심에 늘 김 사장이 있었다. CEO지만 CTO역할을 하며 회사를 키웠다. 엔지니어 스타일이라 영업을 잘 못한다. 되레 판을 깨는 경우도 더러 있다. 김 사장은 사업을 하면서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사업속에서 푼다. 좋은 제품을 개발하면 눈이 똘망똘망해진다. 기술이나 아이디어 방향을 잡게 되면 물불 안 가리고 치고 나가는 성격이다. 70세까지 엔지니어로 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김 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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